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10330/1/BBSMSTR_000000010227/view.do
<12>포획된 전쟁기계 돌궐
기사입력 2011. 03. 30 00:00 최종수정 2013. 01. 05 06:39
중국의 황제이고 당태종 이세민 카리스마 유목민의 칸으로
비사성의 성벽. 고구려 천리장성은 북쪽의 부여성에서부터 남쪽의 비사성에까지 이르렀다.
630년 3월 3일 당 태종은 항복한 돌궐의 군장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그들은 당 태종에게 왕 중의 왕이란 의미의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올렸다. 태종은 겸양의 뜻을 보였다. “나는 당나라의 천자인데 어찌 초원의 칸의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군장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당 태종에게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고, 진정 자신들의 칸이라 여겼다. 군장들과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가한이여 영원하라!” 하고 만세를 여러 번 복창했다. 그것은 문서에서 공식화됐다. 이후 돌궐 군장에 보내는 황제의 도장이 찍힌 편지인 새서(璽書)에 천가한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당 태종에게 황제 자리를 뺐기고 뒷방 노인으로 있던 상황(上皇) 당 고조 이연도 아들 태종의 경이로운 공적에 감탄했다. “800년 전 한 고조 (漢 高祖) 유방은 유목민인 흉노에게 포위돼 곤욕을 치렀지만 보복할 수 없었다. 내 아들 세민은 힐리 칸을 사로잡고 돌궐을 붕괴시켰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연은 당 태종과 여러 비빈·아들·조카들 그리고 공주들을 포함해 모든 왕족들을 궁궐의 능연각(煙閣)으로 불렀다. 대신 10명도 초대됐다.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술이 오갔고 비파 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궁정 악사들이 협연하는 가운데 무희들이 화려한 춤을 추었다.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4년 전 차남 태종에게 맞아 죽은 장남과 삼남 그리고 10명의 손자들의 존재는 잊어졌다. 기뻐 술에 취한 이연은 벌떡 일어나 늘씬한 무희들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함께 몸을 흔들었다. 대신들이 번갈아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상황마마 만수무강하옵소서.” 연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났다. 돌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천신만고 끝의 해방감이 축제를 만끽하게 했다.
다음날 아침 현실로 돌아온 태종은 생각에 잠겼다. 돌궐의 붕괴로 10만 명 이상의 돌궐인들이 중국 땅에 들어오게 됐다. 그들이 항복해 왔다고는 하지만 뛰어난 기동성을 보유한 무력집단이었다. 그들을 중국에 살게 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어떠한 형태로 정착시키는가였다.
신하들 대부분은 돌궐인 종족의 부락 조직을 해체시켜 하남의 주와 현에 흩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유목민인 그들에게 농사와 방직을 가르쳐서 농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언박(溫彦博)이 여기에 반대했다. 농민으로 만드는 것은 고유한 그들의 물성(物性)을 어기는 것이다. 기동성 있고 용감한 전사로서 그들의 장점을 사장시킬 필요가 있는가. 그 부락을 보존하고, 그들이 살았던 땅과 비슷한 만리장성 이남에 정착시켜 중국의 북방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좋은 횟감을 굳이 삶아 먹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심정이었다.
위징(魏徵)은 온언박과 생각이 달랐다. 돌궐은 대대로 우리 중국을 노략질한 원수다. 다행히 지금 깨지고 망해, 항복해 와 차마 다 죽이지 못했다. 그들을 중국에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몽골 초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의 얼굴을 했지만 짐승과 다르지 않다. 약하면 항복을 청하고 강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항복해 온 10만 명의 무리가 시간이 지나 번식해 수가 늘어나면 중국에 우환이 될 것이다.
신하들의 견해를 들은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에 돌궐인들의 부락을 온전히 정착시키자는 온언박의 안을 채택했다. 그는 유목민의 습성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탁월한 전투력이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을 당나라의 기병으로 부리기로 했다.
태종은 돌궐인 부락들을 동쪽의 요서(遼西) 유주에서 서쪽 오르도스 부근의 영주(靈州)까지 나란히 배치했다. 그곳은 몽골의 초원과 중국을 나누는 자연 경계인 고비사막의 남쪽이다. 왕족인 아사나 씨는 각 관할 지역들을 다스리는 도독으로 임명했고, 아래 추장들은 장군(將軍)으로 임명했다. 당 조정에 5품 이상의 돌궐인들이 100명으로 신료의 50%를 차지했다. 장안에 들어와 사는 그들의 가족ㆍ식솔들이 1만 가구에 가까웠다.
거대한 예산이 소요됐다. 한 사람마다 사물(賜物) 5필, 포(袍) 1령을 지급했다. 재정이 풍족해 정착지원금을 준 것은 아니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당나라에 옭아매는 포획장치였다. 태종은 전쟁이 전력의 감소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승리 후 항복한 자들을 자신의 군대로 만들어 전력을 배가시켰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는 그의 저서 ‘천(千)의 고원’의 12장 ‘유목론’에서 전쟁기계(유목민) ‘포획장치’에 대해 말했다. “전쟁기계(유목민)가 국가에 의해 포획될 우려는 항상 상존한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전쟁기계를 포획해 자신의 군대로 편성해 왔으며, 포획된 군대는 더 이상 전쟁기계가 아니며, 오히려 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전쟁기계에 대항하는 수단, 혹은 한 국가가 배타적으로 다른 국가를 파괴하는 수단이 됐다.” 여기서 ‘포획장치’란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적의 힘을 역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정교한 구조물이다.
태종은 적대적인 인물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중국 동란기의 최후의 승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들이 패배했다 해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했다. 태종의 충직한 신하로서 당제국 건설에 이바지한 자들은 한때 적의 수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돌궐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작전을 총지휘한 이정(李靖), 현무문의 쿠데타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위지경덕, 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주역을 담당한 이적(李勣), 유목민을 만리장성 이남에 정착시키는 데 가장 반대한 위징도 그러했다.
위징은 이세민의 형이자 정적인 황태자 이건성의 측근이었다. 그는 일찍이 이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건성에게 권유한 인물이었다. 현무문의 정변 후 태종은 위징을 소환해 심문했다. “너는 어째서 형제를 이간시켰느냐?” 태종의 준엄한 목소리에 주위에 늘어서 있는 자들은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위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태자가 만약 일찍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날의 화를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늠름한 위징의 태도에 이세민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며 그 자리에서 그를 측근으로 삼았다.
태종이 즉위하기 전인 진왕(秦王) 시절의 부하들의 관위가 현무문에서 죽은 형과 동생의 속료였던 자들보다 낮은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섬겨온 상전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불만을 들은 태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왕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해야만 천하의 민심을 복종시킬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날마다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은 백성의 조세에 의한 것이고, 관직을 마련해 정치를 하는 것도 백성을 위한 일이다. 그렇다면 능력이야말로 관리를 등용하는 기초가 돼야 하며 신구(新舊)가 관직의 상하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태종은 항복해 온 유목민 군장들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채용했고, 모두 완전무장한 상태로 자신의 잠자리를 지키게 했다. 일단 굴복한 자에게는 원망이나 시의심으로 접하는 일이 없었다. 태종은 군장들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과 함께 몰이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추장들은 그 도량에 감격해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태종은 나아가 돌궐군장인 글필하력, 아사나사이, 아사나사마 등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혼인 관계로 황제와 군장이 결합된 새로운 씨족이 탄생했다. 씨족 의식은 당 제국을 공동재산으로 생각하게 했고, 제국의 팽창은 씨족 공동재산의 확대를 의미했다. 태종은 향후 유목민 군장들이 이끄는 부락민들을 동원해 투르키스탄과 사막의 인도-유럽계 오아시스들을 정복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태종에게 경악했고 다만 미증유의 영웅적 성취를 바라볼 뿐이었다.
태종이 돌궐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올 것이 확실해졌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631년) 봄 2월 영류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여 리나 됐다. 무릇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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