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8_0050


금관가야의 건국 이야기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緫百姓, 凢一百戶, 七万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飲,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㱏帝建㱏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㫖【是峯巒之稱, 若十明1)伏之状, 故云也.】有殊常聲氣呼喚. 衆庻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隠其形, 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為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惟新家邦爲君后, 爲兹故降矣. 你等湏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㡬仰而観之, 唯紫䋲自天垂而着地. 尋䋲之下, 乃見紅幅褁金合子. 開而視之, 有黄金卵六, 圎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 褁著抱持, 而歸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庻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皃甚偉. 仍坐於床, 衆庻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 則殷之天乙, 顔如龍焉, 則漢之髙祖. 眉之八彩, 則有唐之髙, 眼之重瞳, 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即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謚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即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黄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宫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三國遺事』卷2, 「紀異」2 駕洛國記


(천지가) 개벽한 뒤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를) 지나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9간(干)이라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이 백성을 통솔하였으니 모두 100호에 7만 5000명이었다. 많은 사람이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 우물을 파 (물을) 마시고 밭을 일궈 (곡식을) 먹었다.


때마침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임인(壬寅) 3월 계욕(禊浴)하는 날에 마을 북쪽 구지(龜旨)【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여러 마리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아 그렇게 불렀다】에서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 2~300명이 이곳에 모여 있었는데 사람 소리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며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고 묻자, 9간 등이 이르기를, “저희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구지(龜旨)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만들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발을 구르고 춤추어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9간 등은 그들 말과 같이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오직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아 있었다. 줄의 끝을 찾아보니 뜻밖에 붉은 보자기로 싸여 있는 금으로 된 상자가 나타났다.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있었는데 둥근 것이 해와 같았다. 무리는 모두 놀라고 기뻐서 함께 수없이 절을 하였다. 이윽고 다시 싸서 안고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침상 위에 두었으며 무리는 흩어졌다.


12일이 지난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열어 보니 6개의 알이 변하여 동자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침상에 앉히고 사람들이 공손히 예를 올렸으며 공경함이 그칠 줄 몰랐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이어서 곧 은(殷)나라의 천을(天乙)과 같았고 얼굴은 용과 닮아서 곧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같았다. 눈썹이 8가지 색깔인 것은 곧 중국의 고(高)와 같았고 눈이 쌍겹눈인 것은 곧 우(虞)나라의 순(舜)임금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즉위하였으며,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는데, 혹 수릉(首陵)【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이다】으로도 불렀다.


나라는 대가락(大駕洛)이라 부르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으로도 불렀으니 곧 6가야(伽耶)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기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으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으로 (경계를 지었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임시 궁궐을 세우게 하고 들어가 거처하였는데, 다만 소박하고 검소한 것을 원하여 지붕을 이은 짚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된 계단은 3척이었다.


『삼국유사』권2, 「기이」2 가락국기



이 사료는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건국 신화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지만 일연(一然, 1206~1289)이 지은 것은 아니다. 『가락국기』의 주(注)에 의하면, 고려 문종(文宗, 1047~1083) 대 금관(金官)의 지주사(知州事)로 있던 어느 문인(文人)이 지은 것을 줄여 싣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는 11세기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느 건국 신화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기록 그대로를 믿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9간(干) 등이 구지봉(龜旨峯)에 모여 노래를 부르자 황금알 6개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알이 동자로 변하자 그 중 1명을 추대하여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는 줄거리에는 일정한 역사성이 반영되어 있다.


우선 가야국이 건국하기 이전 아도간(我刀干) 등 9명의 간이 백성을 통솔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김해 지역의 토착 지배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신라의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6촌장에 비견된다고 하겠다. 반면 수로(首露) 등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9간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유이민 세력인 셈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수로가 토착 세력인 9간의 추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곧 수로로 대표되는 유이민 세력이 토착 세력을 누르고 지배권을 차지하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수로 등은 물리력을 동원해 9간으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을 제압한 것이 아니라 추대라는 절차를 밟은 점으로 보아 토착 세력이 지니고 있던 문화를 압도할 만한 경제⋅문화적 선진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여하튼 수로는 큰 충돌 없이 토착 세력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수로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금으로 된 상자 안에 담겨 있던 6개의 황금알 중 하나에서 깨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강(天降)적인 요소와 더불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卵生)적 요소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 천강이나 난생의 요소는 고조선이나 고구려 계통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가야국의 지배층이 신성하게 여겨지도록 설정한 모티프가 한반도 북방 계통의 지배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뜻한다. 다만 수로왕보다 9간이 먼저 나오는 점은 고조선이나 고구려 계통의 천신(天神)이 먼저 나오는 이른바 정복형 신화와는 다른 측면이다. 또한 9간을 포함해 200~300명이 구지봉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함께 춤을 췄다는 것은 일종의 협력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데, 이 역시 다른 건국 신화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사료의 내용이 모두 수로가 즉위할 무렵의 상황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황금 상자 안에 6개의 알이 담겨 있었다는 부분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6개의 알 중 수로가 깨어난 1개의 알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알은 신화와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알에서 깨어난 5명이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 지배권을 행사했는지도 의문이다. 학계에서는 ‘6가야 연맹’을 형성한 후대의 경험이 건국 신화에 반영되었거나, 금관가야가 다른 5가야와의 연맹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당초 알이 1개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6개로 늘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금관가야의 건국 시기를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42년)이라고 한 점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렇듯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 속에는 후대에 추가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 사료는 금관가야의 건국 과정을 알려 주는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서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사료 속에서 후대에 추가된 부분이 무엇이고 어떤 연유로 추가되었는지를 밝힌다면 금관가야를 포함한 6가야의 실체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 사료에 대한 이해는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뿐 아니라 6가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가야의 건국신화와 제의」,『한국고대사연구』39,남재우,한국고대사학회,2005.

『한국고대의 건국신화와 제의』, 김두진, 일조각, 1999.

『신라와 가야의 건국신화』, 박상란, 한국학술정보(주), 2005.

「가야의 건국 설화」, 김태식, 국사편찬위원회, 2003.

「수로왕은 하늘에서,허왕후는 바다에서…」, 백승충, 가야사정책연구위원회 엮음, 헤안, 2004.

「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 백승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혜안, 2001.


관련 이미지

대성동 고분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levelId=ti_008_0010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y_002r_0010_023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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