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22292.html
기마민족설은 임나일본부설의 변종이다
등록 :2019-12-27 05:01 수정 :2019-12-27 09:34
[책&생각]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17) 신화에서 역사로: 우리의 숨겨진 역사, 가야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 거쳐 일본열도 정복 주장…한반도 지배 미화 논리로
가야 고분에서 일본 토기 나오는 건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의 교류 증거일 뿐
가야를 대표하는 판갑(갑옷). 당시 초원의 유목 전사들은 사용하지 않은 형식이다. 실제 전쟁용이라기보다는 신분을 과시하는 가야인들만의 갑옷이다. 강인욱 교수 제공
최근 삼국 중심의 역사에서 소외되어왔던 신비의 나라 가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야의 유물은 삼국시대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부하다. 그럼에도 가야가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배경에는 20세기 초부터 가야를 일본 침략의 합리화 도구로 사용했던 식민지 역사 연구가 존재한다. 원래 임나는 가야를 말하는 별칭이다. 일제는 <일본서기>에 가공되어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들어서 모든 가야는 곧 일본의 식민지라고 왜곡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나일본부를 이용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약간의 표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임나일본부라는 망령을 주장하며 한국을 비하하는 주요 근거로 사용한다. 최근 가야를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지만 여전히 가야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야의 진정한 재평가는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의 가야사 왜곡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해야 한다.
1922년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김해 패총을 조사하는 일본인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왜 조선총독부는 가야에 집착했을까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함께 쇼군이 각 지방 세력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고 각자 통치하던 바쿠후(막부) 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서양의 식민지 개념을 본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한론이 대두했다. 일본열도 안에서 천년 가까이 바쿠후 체제로 살던 그들이 갑자기 바다 건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니 표면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꺼내 들었다.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고,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이 존재했다는 논리를 세운다. 한반도는 태생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은 그들의 명분을 입증할 자료를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찾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일제강점 이전이었던 1907년에 도쿄대학교의 이마니시 류는 김해의 봉황대 언덕에 있는 김해 패총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 야요이시대~고분시대에 사용했던 토기와 유사한 것들이 발견되었다. 김해는 현해탄을 두고 일본을 바라보는 지역이니 교역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것이 곧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상징한다고 단정했고, 이후 30여년간 수많은 일본 학자가 김해 패총을 조사했다.
2016년 나온 책 <고대 일본은 최강의 침략국가였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은 지금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일제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조사를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다. 1910년대에 일제의 고적 조사를 담당한 야쓰이 세이이쓰라는 일본인은 강연록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신공황후에 의해서 신라와 백제, 임나는 우리(=일본)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 후 남한은 우리의 손을 떠났지만, 1200년을 지나 드디어 한반도 전체가 우리의 보호국이 되었다.”
총독부는 그들의 지배논리를 역사를 이용해서 선전하려고 했다. 1915년에 개관한 총독부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전신)에서도 주요한 전시를 ‘임나와 낙랑’으로 삼았다. 총독부의 한국 고대사 정책은 전방위적이어서 인류학에도 미쳤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류학자들은 한국인의 형질을 조사해서 북조선계와 남조선계로 나누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은 천손의 단일민족이지만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혼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생김새를 들어서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일제 이후 관습적으로 쓰일 뿐 형질인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다.
왜 일제는 특히 가야에,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욕망을 투사했는가. 그 이유는 가야에 대한 문헌 기록이 너무나 적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는 점진적으로 신라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자료에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의 기록에도 삼한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독 <일본서기>에서만 가야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수많은 왜곡된 서술로 점철된 <일본서기>는 자기 나라를 찬양하기 위해서 수많은 부분에서 한국과 관련된 부분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 다시 말해, 가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가야를 위한 역사서는 아니다. 게다가 외국 학자들이 난해한 <일본서기>를 제대로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하면서 가야는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이용되기 좋은 조건이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가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전에서 선보인 일본의 옹관과 토기들. 가야에서 출토된 일본 토기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두 지역의 교류의 증거에 불과할 뿐인데, 일제는 이를 임나일본부의 역사적 증거라고 왜곡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임나일본부에서 기마민족설로
가야는 영토를 확장하는 대신에 교역 네트워크로 작지만 강한 나라들의 연맹으로 남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들은 가야에 강대국의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했다. 임나일본부설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도쿄대 쓰다 소키치는 <임나강역고>에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점을 언어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임나가 전라도 일대까지 널리 퍼져서 한반도 남부 전체를 지배했다는 ‘한반도 남부 경영론’으로 확대했다. 당시 일본은 가야를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로 둔갑시켰으니 가야를 거대한 나라로 보는 것이 한국의 식민지 경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가야에 대한 왜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기마민족설로 이어졌다. 에가미 나미오가 제기한 이 설은 서기 4세기에 송화강 중류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를 정복했다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전사가 세운 일본의 야마토국은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고, 따라서 한반도 남부를 정복할 수 있는 국력이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즉, 기마민족설은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막연하게 가야의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 배경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가야 하면 흔히 철이 떠오른다. 가야는 이 철을 사방과 거래하면서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가야의 무덤에서는 갑옷(판갑)은 물론 화려한 마구(말에 끼우는 갖춤새)가 발견되니 군사강국이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하지만 북방 유라시아를 호령한 흉노와 선비족들 사이에서 판갑은 없었으며, 마구도 가야처럼 화려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게다가 가야가 있었던 지역은 험난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말이 달릴 평원이 없다. 실제 무기로 정복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가야 세력은 지리산 자락을 따라서 전라도 일대로 퍼졌다. 이것을 지도로 보면 가야의 영토가 아주 넓어졌기 때문에 가야도 거대한 국가로 보인다. 하지만 새롭게 가야로 편입된 남원이나 장수 같은 지역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역이다. 그러니 이들 전라도 지역은 사실상 토착민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지역의 가야 무덤에서는 가야 물건뿐 아니라 백제의 왕족들이 가장 아끼던 귀중품들도 나왔다. 가야에 편입은 되었지만 독자적으로 백제와도 밀접한 사신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역사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야를 폄하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결여한 채 거대한 나라로 보려는 것은 자칫 일제의 논리로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1931년 일제가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가야고분(창녕 117호분)을 파헤치는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새로운 가야사 연구를 위하여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이 초래한 또 다른 피해는 우리 역사 안에서 가야가 소외되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있다. 가야가 일본 식민지의 정당화에 이용되어왔고, 가야와 관련한 많은 역사 기록을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일제가 만든 프레임을 벗어난 다양한 시각의 연구가 어려웠다.
최근 오랜만에 가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며 과거 가야 연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잡았다. 식민지 시대의 가야 연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하여 우리 속에 남은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 아울러 세계사의 보편성에 근거해 가야의 특성을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가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가야를 알리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막연하게 가야의 고분이 크고 유물이 풍부하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계적으로 보면 가야보다 더 눈에 띄는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만 해도 북방 유라시아나 중원에는 가야 것보다 거대한 크기에 황금 유물을 넣은 고분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야의 소중함은 그 규모가 아니라 독특한 그들만의 삶에 있다. 가야는 세계적으로도 무척 독특한 나라다. 서로 정복하여 통일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웬만한 나라 못지않은 거대한 고분들도 만들었다. 첨단 소재인 철로 무역을 하며 살았던 그들의 언어는 지금도 남아 있다. 경상도 일대에는 유독 고대의 언어 흔적이 잘 남아 있고 각 지역의 사투리가 잘 남아 있다. 그 기원을 가야에서부터 찾는 언어학자들이 많다.
작지만 부유했으며 사방과 교역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의 참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가 지난 세월 어떻게 왜곡되어왔고,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땠는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급하게 짧은 기간에 가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지난 세기를 돌아보며 가야가 우리 역사 안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부터 알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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