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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성
북한이 상상 복원한 대성산성 남문.
목차
1. 개요
2. 이름
3. 설명 : 3.1. 대성산, 3.2. 산성, 3.3. 대성산성에서 안학궁까지
4. 조선왕조실록에서
1. 개요
"홍준아, 평양에 가면 대성산성도 가 보겠지?"
"물론이지. 하지만 성벽은 다 무너지고 남문(南門)도 근래에 복원한 것이니 뭐 그리 볼 게 있을라고."
"그러니까 잘 보고 오라는 거야. 우리가 평양 하면 대동강변의 평양성을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고구려 사람들이 처음 남하(南下)해 자리잡은 곳은 대성산 자락이고, 거기서 무려 150년을 보냈거든. 평양성에서 지낸 기간보다 두 배나 더 긴 거지."
유홍준, 《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 중앙M&B, 1998년, 76쪽.[1][2]
고구려 왕조의 세번째 수도이자 세번째 이중수도이다. 대성산성은 산성 수도였으며 짝으로 평지성 수도 안학궁이 있었다.
2. 이름
현전하는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다.
대성산성(大城山城)
대성산성(大聖山城)
대성산성(大成山城)
우리나라나 북한에서도 책마다 표기가 서로 달라서 성을 이룰 성(成), 재 성(城) 또는 성스러울 성(聖)으로 표기하고 있다. 본 문서에선 조선향토대백과[3]의 설명을 따라 재 성 자로 표기한다.
3. 설명
현 평양시에서 동북쪽으로 8 km 떨어진 대성산에 위치한 총길이(겹성 포함) 9,284 m 둘레 7,076 m인 고로봉식 산성이다.
고로봉식 산성(고로峰式 山城)은 조선 왕조의 정약용이 구분한 네 가지 산성 종류 중 하나로 다른 고로봉식 산성으론 남한산성이 있다.
3.1. 대성산
라이벌 격인 서울의 북한산에 해당하는 산.
대성산(大城山)의 다른 이름은 구룡산(九龍山), 노양산(魯陽山)이다. 가운데가 분화구처럼 움푹 들어가 있고 주위로 장수봉, 을지봉, 소문봉, 주작봉 등의 봉우리가 빙 둘러싸고 있는 지세이다.
유홍준에 따르면 대성산은 해발 274 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으로[4] 주위가 평평한 저지대[5]라서 상대적인 높이는 아주 우뚝하다.
산세로 보면 백두산에서 개마고원을 거쳐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묘향산맥이 묘향산에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내려오다 대동강에서 멈춰선 산이 대성산이다.
근데 풍수가들 가운데는 평양의 진산(鎭山) 역할을 하는[6] 대성산이 북한산보다 높이가 낮아서 평양이 서울보다 인재가 많이 나오지 못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 북한산이 지세가 험악한 산이라서 서울에 좀 억척스러운 사람이 많다고 지적하는 풍수가도 있다. 이런 비과학적 말들은 재미로만 참고하자.
3.2. 산성
산의 골짜기 두 개를 안에 넣고 대성산의 봉우리 여섯 개를 연결해서 성벽을 쌓았으며, 주작봉과 소문봉 사이 남문 쪽 골 안은 2중으로, 주작봉과 국사봉 사이 골 안에서는 3중으로 겹성을 쌓았다고. 성의 직선거리는 동서 2.3 km, 남북 1.7 km로 성문이 남문 포함해 20개가 있는데, 그중에는 전시에만 쓰던 샛길 문도 있다.
성벽은 사암과 화강석을 사각추 모양으로 다듬어서 서로 어긋나게 물리도록 해서 가지런하고 고르게 쌓았다. 성돌 크기는 기초 부분이 60×30 ㎝이고, 상부는 30×20 ㎝이며 성돌 안에서 글자가 약 1천 자 정도 남은 법화경이 발견되기도 했다.
산성은 동쪽과 서쪽으로는 경사가 급하고 남쪽으로는 안학궁과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넓은 계곡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국사봉과 자모산이 있다. 성벽에는 방어용 시설인 치가 65개가 존재했고, 1958년 대성산성 발굴 당시 성 안에서 건물 터 20여 곳과 연못 170개가[7] 확인되었다고 한다. 연못은 대부분 방형 또는 장방형이고 원형이나 삼각형 연못도 있다.
현재 북한에서는 유원지로 개발하여 산책로도 조성해 놓았다. 주작봉 쪽엔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조성했다. 문서 참조. 남문을 1978년에 복원하였다. 복원이라고 했지만 자기들 입맛에 맞춰 새로 지은거나 마찬가지다.
3.3. 대성산성에서 안학궁까지
산성 바로 밑에 안학궁 터가 있다. 고구려의 수도는 평시에 사용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을 따로 마련했다고 알려졌는데, 국내성에서 했던 방식대로 평양으로 천도한 뒤 평지에 안학궁을 짓고 전시용 산성으로 대성산성을 지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750 m.
4.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실록》에는 도적들의 소굴로 쓰였던 적도 있다고 기록했다.
세종 28년(1446년) 평안도 도내에 도적들이 창궐해 대성산을 거점으로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백성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이들 도적들은 평양의 아전이나 관노들과 유착해서 관에서 잡으러 나간다는 소식까지 비밀리에 서로 전해 들은 덕분에 좀처럼 잡히지도 않았다.
그러다 평양의 토관(土官)인 사옥서령(司獄署令) 김간(金幹)이 도적 체포에 나서서 40명을 체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잡아 가둔 도적들 가운데 9명[8]은 감시하던 병사들을 협박해 도망쳐 버렸다.
이때 도적 가운데 이영산(李英山)이란 사람은 나이가 13세였는데 자기 형을 따라 도적의 무리에 있다가 연좌된 것을 세종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봐주려고 했지만 형조에서는 법대로 수괴고 하수인이고 가릴 거 없이 다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세 번이나 아뢰었다.
다른 도적 김춘(金春)과 은산(銀山)도 나이가 모두 18세로 세종은 죄를 한 등급 줄여서 장형 및 3천 리 유배에 그치게 하려고 했지만, 형조는 그러면 처벌하는 의미가 없다며 ‘강도(强盜)’라는 두 글자를 얼굴에 새겨서 거제현 관노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영의정 황희(黃喜) 등도 “지금 나이가 어리다고 처벌을 줄이고 살려주면 또 나이 어린 걸 믿고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며 법대로 엄격하게 처벌하자고 주장했는데, 세종은 기어이 김춘 등의 사형죄를 감면해 주라고 명령하는 유서를 보냈다.
법대로 처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던 의정부도 결국 한 발 물러나 '김춘과 은산은 나이 어려 철이 없어서 범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는 살려주려고 했는데, 대신들이 법대로 해야 한다고 굳이 청해서 내가 일단 할 수 없이 그 말을 따른다마는, 이제라도 아직 사형 안 시켰으면 사형시키지 말고 살려주고, 이미 사형시켰으면 그걸로 됐다.'는 내용으로 유서를 한 통 더 써서 시간차로 유서 두 개가 전달되도록 하자고 했고, 김춘 등은 운좋게 죽음을 면했다.
이후 잔당들이 다시 대성산에 모여 소산과 대불산을 거점으로 약탈을 일삼는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이후 문종 1년(1451년)에도 "대성산에 모인 도둑을 가히 경계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온 것으로 봐서는 도적들이 한동안 대성산을 거점으로 세를 떨쳤던 모양.
주
[1] 위의 만담은 유홍준이 평양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역사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축하차 찾아와서 나눈 이야기.
[2] 실제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서기 427년, 지금의 평양성의 전신인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시점은 양원양 재위 중인 552년이고 실제 옮겨간 것은 평원왕 재위 중인 586년이며, 장안성이 완성된 것은 594년. 즉, 장수왕의 천도 후 안학궁 • 대성산성은 427~586년으로 약 150년, 장안성은 586~668년으로 약 80년이다.
[3] 2008년,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출판.
[4] 서울 북한산은 해발 837m.
[5] 북한식 표현으론 벌방지대.
[6]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평양의 진산이 금수산으로 되어 있다. 이건 장안성의 진산이다.
[7] 세종실록에도 산성 꼭대기에 연못이 99개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하더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세종 당시에는 연못이 3개뿐이었고,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거나 순채(蓴菜)를 캤다고.
[8] 추격군에게 두 명이 사살되고 두 명이 다시 잡혀서 결과적으로는 다섯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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