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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 해설난중일기 23] 원칙주의자 힘은 실력
일요서울 입력 2015-12-07 11:05 승인 2015.12.07 11:05 호수 1127 54면
- 무과시험 29명 중 12등으로 합격… 종9품 임명
- 직속상관 거문고 제작 오동나무 베라 명령 ‘거부’
<죽도 동백나무>
이순신은 2월 4일 북봉 연대를 시찰하고, 성벽 주위에 파놓는 장애물인 해자를 살폈다. 그런 뒤 5일부터 다시 동헌에서 쌓여 있는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 1592년 2월 5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활 18순(90발)을 쏘았다.
▲ 1592년 2월 6일. 맑았다. 내내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순찰사의 편지 두 통이 왔다.
▲ 1592년 2월 7일. 맑았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발포 만호가 부임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편지가 왔다.
2월 6일 일기의 ‘두 통’을 뜻하는 원문은 ‘이도(二度)’다. 이도를 번역자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횟수라고 보아 ‘두 번’, 어떤 이는 ‘두 장’, 어떤 이는 필자처럼 ‘두 통’으로 번역했다. 도(度)는 실제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문서나 편지를 셀 때 사용하는 단위로 ‘통·건’,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의 답안지를 셀 때 쓰는 단위, 일의 횟수를 셀 때의 ‘번’, 매를 때릴 때 사용하는 단위인 ‘대’의 뜻도 있다. 《난중일기》에서 ‘통’과 ‘번’, ‘대’의 뜻으로도 사용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6일 일기의 경우 《난중일기》의 다른 사례와 비교해 보면, ‘통’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2월 7일 일기의 “발포 만호가 부임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편지가 왔다.”는 것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부임절차에 따른 것이다. 하급 관리들이 관직에 임명을 받은 뒤에는 상관에게 미리 공식 접견을 요청하고 방문해 부임 인사를 올렸다. 발포는 오늘날 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다. 만호(萬戶)는 도(道)의 진(鎭)에 딸린 종4품 무관직(武官職)이다. 이순신은 1580년(36세) 발포 만호, 1586년(42세) 함경도 조산보 만호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경험한 두 번의 만호직은 모두 기회였고 동시에 시련의 시기이기도 했다. 기회의 측면에서 발포 만호 직은 이순신이 처음으로 수군을 경험하면서 바다와 수군, 왜구를 알 게 해주었다. 조산보 만호에서 파직된 직후, 백의종군을 하면서 우화열장으로 참전했던 여진족 시전부락공격작전 때에는 화포의 위력과 활용방법에 대한 지혜를 얻는 기회였다. 바다와 일본군의 특징, 화포의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던 두 번의 만호 경험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대비하고, 전승(全勝)할 수 있었던 지혜의 원천이 된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보면, 좋은 기회가 온 뒤에는 언제나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다. 발포 만호 시절과 조산보 만호 시절의 이순신의 기록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저술한 《이충무공행록》으로 알 수 있다. 관행과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 때문에 시련을 겪는 이순신의 모습이 나온다. 그 때의 이순신은 오늘날 청렴하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겪는 모습과 똑 같다.
1576년 2월, 무과시험에 29명 중 12등으로 합격한 이순신은 12월에야 종9품인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에 임명되었다. 여진족과 국경을 맞댄 최전선이었다. 2년여를 근무한 뒤 1579년 2월에 임기가 끝나 서울 훈련원 봉사(종8품)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에 임명되었다. 1580년 7월 종4품인 발포 만호가 되었다. 그러나 1년 반 만인 1582년 1월 파직되었다. 종9품 이순신이 4년 만에 종4품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가 파직된 것이다.
그의 출세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지만, 그의 추락은 세상이 요구하는 모나지 않은 삶을 거부한 대가다. 또한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넘쳐나는 마피아와 같은 사람들, 다른 사람의 능력을 질투하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함경도에서 돌아와 훈련원에서 근무할 때가 시련의 발단이다. 이순신은 인사담당 하급관리였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인사담당 부서의 하급 실무자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사철만 되면 늘 시끄럽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관인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하급 실무자인 이순신에게 자신의 지인을 강력히 추천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승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을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시킬 수 없고, 억지로 추진한다면 그 때문에 승진할 차례가 된 사람이 피해를 입는 불공평한 일이며, 결정적으로 불합리한 조치를 위해 법을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며 거부했다. 하급 실무자, 게다가 무신 이순신의 단호한 거부권 행사가 서익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다. 그것이 이순신의 발포 만호 파직 원인이 되었다.
발포에서 이순신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라 관찰사 손식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이야기를 듣고 벌을 주려고 시험하기도 했다. 이순신에게 진법책을 읽게 하고, 진도(陣圖)를 그리게 했다. 초고속 승진한 이순신이 진짜 실력이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인정받았다. 진법책과 진도 이야기는 이순신의 병법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훗날 한산대첩 때의 학익진이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이순신에게 요구했지만, 이순신이 거부했다. 이순신은 말했다. “나라의 물건이고, 오래전에 심은 나무를 하루 아침에 벨 수 없다.” 성박 역시 화가 치밀었지만, 이순신의 주장이 타당했기에 어쩌지 못했다. 또 다른 수사 이용도 이순신을 미워했다. 심지어 이순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불시에 점검하고는 이순신 관할 발포가 결원이 많다며 허위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순신의 발포가 결원이 가장 적었다. 이순신은 이용의 허위보고에 대비해 다른 곳의 결원 명단을 확보해 자신에 대한 모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참된 실력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누군가가 알아본다. 발포 만호 이순신은 여러 상관들에게 의심을 사고, 견제를 받았지만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다. 전라도 관찰사와 수사가 모여 인사평가를 할 때 일이다. 이순신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많았기에 발포 만호 이순신은 최하로 평가되었다. 그러자 당시 전라도 도사(都事)였던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거부했다. 그는 말했다. “이순신이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이 도에서 최고라고 한다. 다른 여러 진을 모두 최하에 둘 수는 있어도 이순신을 그렇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결국, 외나무 다리에서 위기를 맞았다. 악연 서익이 군기시의 경차관으로 내려와 이순신을 결국 파직시켰다.
1576년 1월 과거급제와 12월 종9품 함경도 권관, 1579년 종8품 서울 훈련원 봉사, 1580년 종4품 발포 만호, 1582년 1월 파직과 5월 종8품 서울 훈련원 봉사 복직. 무과급제 후 7년 동안 우리 국경 최북단 함경도에서 최남단 발포에 이르는 그의 삶은 마치 청룡열차를 탄 모습이다. 그러나 그 청룡열차에서 이순신은 정신을 잃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그의 삶은 말한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책임을 다하며 지킨 원칙은 배신하지 않는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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