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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 해설난중일기 33] '난중', 일기제목 아니다!

일요서울 입력 2016-02-15 09:46 승인 2016.02.15 09:46 호수 1137 48면 


- 1962년 ‘국보 76호’ 92년 세계기록유산

- 설의식, 《민족의 태양》 제대로 된 첫 한글번역본


<이순신 초상화>


유네스코에서는 1992년, 세계의 중요 기록물이 전쟁과 사회변동으로 인해 멸실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물 중에서는 2016년 2월 현재까지 13건이 등재되었다. 1997년,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해례본》이 처음 지정되었고, 이후  《승정원일기》《동의보감》 등을 비롯해 2015년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까지 등재되었다.


이중 눈에 띄는 기록물의 하나가 2013년에 등재된 이순신의 《난중일기》이다. 다른 기록물과 달리 국가 혹은 다수의 인물들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일기이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밝힌 등재 이유는 “군 사령관이 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서술한 기록으로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기록했다.


또한 “임진왜란에 관한 전쟁 사료 중 육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자료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반면 해전에 관한 자료로는 《난중일기》가 유일하다고 할 만하다. 이런 관점에서 《난중일기》는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군사적 갈등을 포함한 세계사 연구에 중요하며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매우 귀한 자료”라고 자료의 객관적 중요성도 언급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 몇십년 전인 1962년에 이미 우리나라에서 국보 76호로 지정해 보존 및 보호조치를 하고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남긴 일기도 많다. 이순신 전후 시대의 인물들의 대표적인 일기들은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1567년 10월 1일~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간의 일기), 오희문의 《쇄미록》(1591년 11월 27일~1601년 2월 27일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일기), 이탁영의 《정만록》(1592년 3월 9일~1599년 11월까지 7년간의 일기), 정경운의 《고대일록》(1592년 4월 23일~1609년 10월 7일까지 18년간의 일기), 양반 여성인 남평 조씨의 《병자일기》(1636년 12월~1640년 8월까지 4년간의 한글 일기) 등이다. 일기를 쓴 기간을 살펴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이다. 그 중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유네스코의 평가처럼 군 사령관의 장기간에 걸친 일기로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경우다.


세 종류의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모두 3종류가 있다.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친필 초서본>,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속에 편집해 넣은 일기, 박정희 대통령이 표제를 쓴 《재조번방지초》 속의 일부 일기가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즉 《난중일기》란 책 제목은 친필 초서본의 제목이 아니다.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친필 초서본>을 편집하면서 7년간의 일기를 《난중일기》라고 통칭한 데서 유래한다.


이 세 종류의 일기는 각각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친필 초서본>은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이다. 총 7권이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1592년 1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 을미년(1595년) 일기는 사라진 상태다. 《이충무공전서》는 <친필초서본>에 없는 일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편찬과정에서 <친필 초서본>을 단순화했거나, <친필 초서본>에 있는 메모 혹은 편지·보고서 초안 같은 글을 배제했다. 그럼에도 사라진 <친필 초서본> 일기가 포함되어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재조번방지초》 속의 일부 일기는 비록 옮겨 적은 시기가 1600년대 말경으로 추정되나, 기존의 <친필 초서본>이나 《이충무공전서》 속의 일기에서는 볼 수 없는 30여일의 일기가 들어있다.


부끄러운 《난중일기》 한글 번역사


 <친필 초서본>이든 《이충무공전서》 속의 《난중일기》든 모두 본래 한문이다. 이순신은 당시 양반 사대부의 관행에 따라 한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썼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몇 글자라도 한글이 들어간 최초의 《난중일기》는 우리나라 사람 손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경성일보 사장이었던 일본인 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가 《이순신전집(李舜臣全集)》(1917년)을 서울에서 출간할 때 《난중일기》 일부분을 국한문으로 넣은 것이 처음이다.


그 후 부분 번역물이었지만, <동아일보>와 <신동아>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설의식이 전쟁 중인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한 《민족의 태양》이 제대로 된 첫 한글 번역본이다. 설의식은 1953년에 다시 발췌 번역본인 《난중일기초-충무공 이순신 수록-》을 출간했다. 설의식이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난중일기》 한글 번역자이다.


1955년, 홍기문은 북한에서 《리순신장군전집》 속에 《난중일기》를 전체를 번역해 넣었고, 남한에서는 1960년에 이은상이 각고의 노력 끝에 완역한 《이충무공전서》에 《난중일기》를 번역해 넣었다. 그런데 설의식·홍기문·이은상의 번역본들은 모두 그 저본이 <친필 초서본>이 아니었다.  《이충무공전서》 속의 《난중일기》가 번역의 저본이었다.


그 후 이은상이 1968년, 드디어 <친필 초서본>을 저본으로 최초 번역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번역본에는 <친필 초서본>에 들어있는 각종 메모와 편지 및 장계 초안 등은 누락되어 있다. <친필 초서본>의 한글 번역은 다시 30년이 흐른 1999년에야 세상에 나왔다. 해군사관학교 교수 최두환이 《충무공 이순신 전집(1~6)》이란 이름으로 <친필 초서본> 속의 일기는 물론이고 메모와 편지 및 장계 초안까지 전체를 처음으로 번역했다. 일본인에 의한 국한문 번역본 이후 무려 82년 만의 일이다.


1953년, 설의식은 6.25라는 민족의 대위기 앞에 고뇌하며, 이순신이 다시 이 땅에 빛을 비춰주기 바라는 듯 말했다.


“민족의 혈사(血史)가 시작된 뒤로 세상은 한 자국 어지러워졌고 한 걸음 괴로워가는 양 싶습니다. 이리하야 ‘국난(國難)’이란 서글픈 용어 밑에서 그날을 보내고 그날을 맞을 뿐입니다. … 태양같은 ‘그 어른’의 모습에 힘을 얻어서 타고난 정열을 알맞게 뿜을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고마우신 유덕(遺德)을 다시금 합장(合掌)하면서 이 글을 끝칩니다.(《난중일기초》 서문)”


설의식은 또 노래했다.


“충민(忠民)으로써 충국(忠國)한 이순신(李舜臣). 애민(愛民)으로써 애국(愛國)한 이순신(李舜臣). 충(忠)과 효(孝)를 겸하고, 지(智)와 용(勇)을 겸하고…. 신(信)과 의(義)를 겸하고, 강(剛)과 유(柔)를 겸하고…. 무위(武威)와 문덕(文德)을 아울러 지니신 그 몸마저를 버리어 ‘신망국활(身亡國活)’. 거룩도 하여라 민족(民族)의 태양(太陽)이여!”(<국난과 극복>)


설의식의 말과 노래가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또 둘러보면 수많은 이들이 설의식처럼 간절히 이순신과 같은 리더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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