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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난중일기 37] 이룰 수 없었던 신선 같은 삶

일요서울 입력 2016-03-14 10:36 승인 2016.03.14 10:36 호수 1141 48면 


<기산 김준근 돌싸움 그림>


- 김훈 ‘칼의 노래’서문… 장군 시대상황 고통 묘사

- 돌던지기, 고구려때 있었던 민속놀이 겸 군사훈련


김훈의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로 시작한다. 봄날의 경치치고는 너무나 서럽고 쓸쓸한 모습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명령을 받고 풀려난 이순신의 상황과 고통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봄이 온 남도의 섬들


《칼의 노래》와 전혀 다른 봄날의 모습이 《난중일기》 1592년 2월 19일과 20일에 나온다. 2월 19일, 이순신은 자신의 업무공간인 여수 좌수영을 떠나 관할지역의 시찰에 나섰다. 남도 바닷가에 봄이 왔지만, 비가 오지 않아 나무와 풀들은 메말라 있었다.


2월 1일과 10일, 목마른 땅을 적셔줄 비가 내렸지만 안개비였을 뿐이다. 대지는 여전히 새 생명에 힘을 불어넣어줄 비를 기다렸다. 2월 15일, 마침내 많은 비가 내렸다.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내리자 남도 섬의 풀들은 일제히 꽃을 피웠다. 2월 19일, 이순신은 생명수를 머금고 한꺼번에 피어난 꽃을 보고는 그 경치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감탄했다. 그러나 봄볕을 제대로 즐길 틈도 없이 전쟁준비 상태를 점검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 1592년 2월 20일. 맑았다. 아침에 각 항목의 방어 준비와 전선(戰船)을 점검했다. 모두 새로 만들었다. 군대기물(軍器)은 모두 멀쩡한 것이 드물었다. 늦게 출발해 영주(瀛州)에 도착했다. 좌우의 산에 핀 꽃과 들판의 싱그러운 풀이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는 영주(瀛州)도 이런 경치였을까.


배를 타고 그림처럼 수놓인 섬 사이를 지나며 영주에 도착했다. 영주에서는 꽃 잔치가 한창이었다. 이 날 일기에 등장하는 영주는 당시의 정식 명칭인 흥양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는 전남 고흥이다. 영주는 중국 전설에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흥양의 경치가 아주 아름다워 흥양을 신선이 사는 그 영주로도 불렀다.


해야 할일이 너무 많았던 이순신


이순신이 흥양을 그저 관행에 따라 흥양이라고 쓰지 않고, 영주로 부른 까닭은 그만큼 흥양이 아름답고, 또 훗날 자신의 소명을 다한 뒤에는 신선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이다. 18세기 문인 이하곤은 해남과 강진 여행할 때 “지척에 영주가 있으니, 가서 신선이라도 되어 볼까”라고 노래했다.


이날 일기에서 이순신은 이하곤처럼 직접 신선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영주와 신선은 그렇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순신과 신선.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하다. 또 피바람이 불던 전쟁터를 전전한 이순신의 삶을 보면, 그가 신선의 삶을 꿈꿨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한 손에 칼을 들었지만, 다른 한 손에 붓을 든 시인 이순신의 모습을 안다면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이야기다. 또 그냥 붓을 든 것이 아니라, 시인 이순신이기에.


실제로 이순신이 신선을 언급한 기록도 있다. 《난중일기》와 함께 국호 제76호로 지정된 서간첩에 있다. 이순신이 지인인 현덕승과 현건에게 보낸 편지이다. 현덕승이 산속 절에서 유람하면서 “산이 높아 하늘에 닿는 것이 멀지 않고, 물이 고와 신선을 머지않아 만나겠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자, 이순신은 그 답신으로 “저와 같은 하급 관리는 바쁘게 일만 하느라 함께 감상할 길이 없습니다. 제게 신선이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농담하신 것은 진실로 정확히 논한 것이라 껄껄 웃었습니다”라고 호탕하게 편지를 보냈다. 또 다른 지인인 현건의 편지 답장에서도 신선의 삶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 “신묘년(1591년)에 옥주(진도) 군수에 임명되어 가는 길에 귀 댁(仙庄, 선장은 상대방 집의 높임말)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로 매번 서호강(西湖)과 월악산(月岳)의 연기 같은 구름, 나무와 대나무의 경치가 생각나 정신이 달려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1598년 2월 19일)


이 편지의 월악산은 충북의 월악산이 아니라, 전남 영암군에 있는 월출산이다. 정읍현감에서 승진해 진도 군수에 임명되어 진도로 가는 길에 영암을 들리면서 마주한 월출산의 풍경에 매료된 모습이다. 그러나 현덕승이 지적한 것처럼 일중독자와 다름없는 이순신에게 신선의 삶은 사치이다.


특히 자신의 소명을 알고 있었기에 “껄껄 웃으며” 자신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세속의 온갖 욕망과 갈등을 털어버리고 신선처럼 살고 싶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달을 품은 이순신, 고독한 시인 이순신의 내면이다.


전쟁 준비를 위한 철저한 점검


이순신이 전쟁준비를 위해 점검한 다양한 내용은 《경국대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배는 처음 건조한 후 8년, 그 후 다시 6년 후에 수리했고, 그 후로 8년이 지나면 폐기했다. 이로 보면 사용연수는 24년이었다. 군대기물은 서울에서는 군기시, 지방에서는 각 진(鎭)에서 규정에 따라 제조하고, 기존의 것들도 항상 수리·정비케 했다.


군사들이 개별적으로 휴대한 무기는 서울에서는 병조에서, 지방에서는 고을 수령이나 병사·수사가 검열했고, 이들 군대기물에는 해당 진(鎭)의 이름을 불도장으로 찍어 소속을 알 수 있게 해놓았다. 군대기물에 소속을 표시한 것의 실제 사례는 전쟁 발발 후, 경상도를 구원하러 출전하는 일을 보고한 장계(1592년 4월 30일)에도 나온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출전계획을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런데 공문을 갖고 간 이언호가 본 남해현의 모습은 휑한 모습이었다. 관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고, 무기고 속의 무기들도 없어진 상태였다. 이언호는 돌아오는 길에 어떤 사람에게 화살의 한 종류인 장전(長箭)을 받았는데, 그 장전에 ‘곡포’가 새겨져 있었다. 곡포는 경상 우수영 소속이다.


이순신이 방문한 영주, 즉 흥양의 현감은 배흥립 장군이다. 미암 유희춘이 전라관찰사로 순시를 할 때 흥양을 시찰했다. 그 때 그는 흥양 사람들의 남다른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활쏘기와 돌 던지기를 시험했는데 이 고을 사람은 다른 군(郡)보다 웅장하고 용감함이 배나 더했다. 군대기물 정비도 아주 뛰어났다(유희춘, 1571년 4월 14일)”


돌 던지기는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민속놀이 겸 군사훈련이다. 유희춘이 관찰사로 부임한 뒤, 1510년 삼포왜란 때 김해·웅천에서 투석전으로 왜구를 격퇴했던 경험을 되살려 군사훈련화했다. 돌싸움 훈련이 된 흥양 사람들, 전라도 사람들은 훗날 명량해전에서도 돌을 던지며 활약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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