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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0] 꽃비(花雨)에 젖다
일요서울 입력 2016-04-04 09:47 승인 2016.04.04 09:47 호수 1144 49면
- 생명과 사랑, 그리고 평화의 상징 ‘비’
- 일기 속 장군 ‘가뭄’ 걱정하는 장면 ‘곳곳’
<갈모와 도롱이,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매년 4월이 되면 진해에서는 군항제가 열린다. 1953년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고 추모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다.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고, 벚꽃을 즐기는 시간이다. 올해는 4월 1일부터 10일까지다. 36만 그루의 왕벚나무에서 핀 벚꽃, 장관 중의 장관이다. 꽃잎이 떨어질 때는 함박눈이 날리는 듯하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꽃비가 내린다.
꽃비에 흠뻑 젖은 이순신
▲ 1592년 2월 23일. 흐렸다. 늦게 배를 출발시켜 발포에 도착했다. 역풍(逆風)이 크게 불어 배가 나아갈 수 없었다. 성두(城頭)에 간신히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말을 탔다. 비가 아주 많이 쏟아져 모든 일행이 꽃비(花雨)에 다 젖었다. 발포에 들어갔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이 해 2월에는 1일과 10일 안개비가 내렸고, 15일 많은 비가 내려 시든 나무에 단비가 되어주었다. 그 비로 꽃이 피기 시작했고, 이순신은 19일에 만발하는 꽃을 보고 기뻐했다. 20일, 고흥에 도착했을 때는 꽃들이 그림처럼 수놓여 신선이 사는 곳처럼 느낄 정도다. 날씨는 계속 화창했다.
22일 녹도에서는 아름다운 경치에 취했고, 녹도 만호 정운의 나라를 위한 열정이 곳곳에 배어 있어 더 즐거워했다. 임무수행을 위해 다시 배를 타고, 말을 타고 비를 맞아가며 발포에 도착했다. 2월 23일은 425년 전의 양력 4월 5일이다. 오늘날 진해군항제 시기와 일치한다. 전쟁준비에 바쁜 하루하루 속에서 부족한 곳은 부족한 것을 채워야 했고, 제대로 된 곳은 책임자들을 격려하기 바빴다. 걸음걸음에는 아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만개한 봄꽃은 바쁜 마음에 잠시의 여유로움을 주기도 했다. 이순신에게 내린 비는 그냥 비가 아니라 꽃비였다. 그에겐 생명과 사랑, 평화의 상징이었다. 전쟁이 없는 나라, 침략 당하지 않는 나라를 염원하는 그의 마음이었다. 발포로 가는 도중에 비는 그의 온몸을 다 적셨다. 오늘날은 비옷이나 우산 등으로 비를 피한다. 많은 비에는 옷이 젖기 마련이다. 이순신 시대에는 비옷이나 우산 같은 것은 없었을까. 다음은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피난 생활을 했던 오희문의 일기이다.
▲ 1594년 8월 2일. 가는 도중에 큰비가 내렸다. 항아리로 퍼붓는 듯했다. … 사의에 비가 새서 옷이 다 젖었다.
‘사의’는 《난중일기》에 등장하지 않는 말이다. 옛사람들이 비가 올 때 옷을 적시지 않기 위해 썼던 도롱이다. 비슷하지만 지방마다 우리말 표현이 다르다. 도랭이·도롱옷·드렁이·도링이·되랭이·되롱이·되롱 등이다. 그만큼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했다는 증거다. 도롱이는 짚 같은 것으로 촘촘히 엮어 빗물이 스며들어 옷과 몸을 젖지 않게 만든 것이다. 이순신이 그날 도롱이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많은 비 때문에 젖었다.
비, 세심한 관찰의 기록
《난중일기》 원문을 읽다보면 비에 관한 다양한 표현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 비의 형태나 굵기, 내리는 시점, 기상의 변화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냥 조금 내리는 비는 우(雨), 하루 종일 계속 내리는 비는 우우(雨雨), 이슬비인 소우(小雨), 많이 내리는 큰비인 대우(大雨),가랑비인 세우(細雨), 보슬비인 쇄우(灑雨), 안개비인 연우(煙雨), 소나기인 취우(驟雨), 폭우(暴雨), 장맛비인 음림(陰霖)과 임우(霖雨), 궂은비인 음우(陰雨),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대풍우(大風雨), 때 아니게 내리는 궂은 비 혹은 자주 내려 괴롭히는 고우(苦雨)가 나온다.
비가 내리는 모습도 다양하게 기록했다. 한문 원문이 아니라 한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내리 부었다. 빗발이 삼대 같았다. 부슬부슬 내렸다. 보슬보슬 내렸다. 가늘게 내렸다. 보슬비가 흩날리며 내렸다. 잠깐 내렸다. 오락가락했다.
조선 태종과 비와 관계된 전설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 1597년 5월 10일. 궂은비가 내렸다. 이날은 태종(太宗)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늦게 큰비가 내렸다.
이날 일기를 의역해 설명하면, 태종의 제삿날에는 옛날부터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실제로 그날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태종 때는 가뭄이 아주 빈번해 재위 18년 동안 28회의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일 년에 한두 번씩 기우제를 지내야 할 정도로 가뭄이 심각했다. 심지어 태종은 가물 때 죽었는데, 가뭄에 한이 맺힌 태종은 죽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유언했다. 그런 뒤 실제로 비가 내렸기에 이 시기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
이는 《영조실록》 1764년 5월 10일 기록에도 나온다. “매년 이날에는 갑자기 비가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 유언으로 남길 정도로 태종은 간절히 비를 바랐다. 태종 때의 기우제는 다양했다. 용을 담은 동물이라며 도마뱀을 항아리에 넣고 비를 기원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한강에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기도 했다. 물의 신과 같은 용을 자극하기 위해 육지의 맹수 호랑이를 물 속에 넣어 서로 싸우게 만들어 용이 싸우다가 땀방울(비)이라도 흘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빈번한 가뭄에 고통 받으며 간절히 비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기우제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기우제의 효과가 있었을까. 효과가 없었던 경우도 있었으나, 가끔은 기적처럼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유희춘의 1570년 5월 12일 일기에는 선조 임금이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그 이후 계속 비가 내려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1574년 6월 2일에도 새벽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가뭄이나 장마가 농사를 망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선조들의 마음이 담긴 결과가 아니었을까. 《난중일기》에도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려 기뻐하는 모습, 가뭄을 걱정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 1593년 7월 16일. 아침에는 맑았으나, 늦게 구름이 끼었다. 저녁에 소나기가 내렸다. 농민의 바람을 적셔주었다.
▲ 1596년 5월 6일. 아침부터 흐렸다. 늦게 큰비가 내렸다. 농민의 바람을 가득 채워주었다. 기쁘고 행복한 것이 말할 수 없었다.
▲ 1594년 6월 12일. 큰바람이 불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가뭄이 아주 심했다. 농사가 걱정이다. 더욱더 걱정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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