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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1] 육군에서 수군명장으로

홍준철 기자 입력 2016-04-11 09:20 승인 2016.04.11 09:20 호수 1145 49면


- 1년 반 수군 경험인데 수군 대장으로 왜

- 장군이 지켜낸 함경북도 北 핵실험장으로


<북관유적도첩 수책거적도 부분, 고려대 소장>


양력 4월 5일, 이순신은 꽃비를 맞아가며 발포에 도착했다. 하루를 머문 뒤 다시 전쟁준비를 위한 길을 떠났다. 발포는 36세 이순신이 종4품 만호로 처음으로 남쪽 바다에서 근무했던 곳이다. 또 관료로 첫 시련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종9품 이순신이 4년 만에 종4품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가 1년 반 만에 파직되었다.


▲ 1592년 2월 24일.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렸다. 눈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다. 마북산 아래 사량에서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했다. 사도에 도착했다. 흥양 현감이 벌써 와 있었다. 전선을 점검하고 검열했다. 해가 저물어 그대로 머물러 묵었다.


세월이 흘러 전라좌수사가 되어 발포성 관아에 들어갔을 때, 이순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봄비 속을 달리며 12년 전의 과거로 한 번쯤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과거의 기쁘고 아팠던 기억은 어제였을 뿐이다. 그는 다시 꽃비 속에서 이순신의 바다로 향했다. ‘눈 앞’이라고 번역한 일기 원문은 ‘咫尺(지척)’이다. 길이 단위로 지(咫)는 24cm, 척(尺)은 33.3cm 정도이다.


조선시대 길이 단위는 촌(寸), 척(尺), 장(丈)이 있다. 촌과 척은 길이 단위로 읽을 때는 ‘치’와 ‘자’로 읽는다. 1치는 3.3cm, 1자는 33.3cm, 1장은 3.33m이다. 때문에 지척은 아주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마북산(馬北山)은 전남 고흥에 있는 산으로 오늘날은 마복산(馬伏山)으로 아름다워 작은 금강산이란 뜻의 소개골산(小皆骨山)으로도 불린다.


함경도 여진족과 바다, 수군 장교 이순신


 통설에서는 수군대장 전라좌수사 이전의 이순신이 수군 경험을 한 것은 발포만호 시절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1년 반 정도의 수군 경험을 가진 사람이 난데없이 수군대장이 되어 혜성처럼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료들을 살펴보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순신은 1586년 1월 함경북도 조산보 만호(종4품)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에 임명되었다. 8월 여진족의 침입에 따른 책임문제로 파직 및 백의종군을 하면서 1588년 1월 여진족 토벌작전에 참전했고, 6월 고향 아산으로 낙향할 때까지 함경북도조산보를 중심으로 계속 활약했다.


조산보와 수군과는 어떤 관계인가. 함경북도, 여진족이라는 평면적인 관점에서는 수군과는 전혀 관계없다. 그러나 그곳에도 수군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함경도 경흥도호부를 설명하면서 두만강과 동해바다가 인접한 곳이라고 하고 있다. 경흥도호부에는 조산포(造山浦)가 소속되어 있다. 조산포에 설치된 보루가 이순신이 근무했던 조산보인 듯하다.


조산포에는 경흥도호부의 다른 지역과 달리 “병선이 머무르며, 만호가 거느리는 선군(船軍, 수군) 90명이 국경을 방어”했다. 경흥도호부의 주요특산물로 언급된 것도 “연어·다시마·문어·대구·붉은게”이다. 조산보는 배를 타고 바다로 침입하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곳이었다.


《경국대전》에서도 함경북도 조산포과 함경남도 낭성포와 도안포에 수군이 배치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중종 4년(1509년), 유순정이 낭성포와 도안포의 수군을 육군으로 전환시키자고 건의한 뒤 조산포에만 수군이 계속 유지되었다. 유순정이 건의한 날의 기록에는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순정이 주장하기를, ‘… 녹둔도가 비옥해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조산보(造山堡)에 근무하는 군사들이 모두 수군(水軍)으로 거의 대부분이 능력이 부족하고 약하며 적을 방어할 기구도 부실합니다. 농사짓는 때에 적의 침입이라도 있으며 반드시 경작하는 시기에 혹 적변(賊變)이 있으면 반드시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이로움과 해를 살펴보면 이전처럼 농사를 금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중종 4년 4월 29일)


몇 십 년 전에 예견된 여진족 침입


 조산보에는 부실한 소수의 수군이 있었고, 녹둔도에서는 둔전이 있었으며, 적(여진족)의 침입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을 하다가 여진족의 기습으로 백의종군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 이유를 몇 십 년 전에 이미 예견한 내용이기도 하다.


중종 때의 다른 기록(중종 9년 10월 13일)에도 조산보와 녹둔도 이야기가 나온다. 홍문관 부응교 이빈이 조산보 방어 계책을 건의한 내용이다. 그 핵심은 경흥에 인접한 바닷가에 배를 잘 부리는 여진족의 한 부족인 올적합(兀狄哈)이 거주하고 있어 조산보와 녹둔도가 위태롭기에 문무를 겸비하고, “훗날 능히 병마사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보내야 여진족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조산보는 세종 시대 이래로 수군이 주둔해 바다로 침입하는 여진족을 방어했던 곳이다. 또한 조산보 만호는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미래의 명장 재원이 발탁되던 자리였다.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에 임명된 것은 행운이나, 인맥 등의 요인이 아니라 그의 경험과 능력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무과 급제 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건원보 권관을 경험하면서 국경 밖 여진족에 익숙했고, 또 발포 만호로 바다를 경험했고, 문무를 모두 갖춘 미래의 국가 동량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순신의 바다 경험도 전라도 발포와 함경도 조산보에서 잠시 했었던 것은 아니다.


이순신과 바다는 관계가 아주 깊다.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십대 때 외가가 있던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산 역시 한 쪽 면은 바다이다.  이순신은 아산에서 자연환경으로 바다를 일상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었기에 발포와 조산보에서 수군을 지휘할 수 있는 바탕을 갖출 수 있었다. 게다가 문과 집안의 영향으로 독서의 힘과 글의 위력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고난에 좌절하고 않고 도전하는 자세와 치열한 노력이 더해져 역사의 획을 그은 인물이 된 것이다.


지금은 조선 수군대장 이순신을 키워낸 조산보는 남북 분단으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이순신이 여진족과 전투를 하다가 화살을 맞으며 지켜낸 녹둔도는 러시아 땅이 되었다.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대비’가 함경북도 나선시에 있으나 이 역시 찾아가 살펴볼 수 없다. 선조들이 피눈물로 지킨 나라가 쪼개진 것이다.


이순신이 말 달리던 함경도, 선조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던 땅도 잃고 서로 원수가 된 것이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북한은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명장과 무명의 백성들이 지켜낸 함경북도를 핵실험장으로 만들었다. 통곡할 일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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