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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39] 진심(眞心)으로 진심(盡心)을 다하라

일요서울 입력 2016-03-28 10:05 승인 2016.03.28 10:05 호수 1143 49면


<조총, 전쟁기념관 소장>


- 노력, 배신하지 않는 평생의 벗

- 혁신하는 리더 VS 틀에 갇힌 리더


‘헬조선·노오력·○세대’라는 말이 단 하루도 언급되지 않는 날이 없다. 금수저와 흙수저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청년들이, 또 중년들이, 어르신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자괴감을 넘어 절망의 벼랑에 서 있다. 그런 시대에 어쩌면 ‘성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꿈꾼다. 하다못해 일확천금을 위해 로또를 산다. 노력이든 노오력이든 혹은 노오오력이든, 행동 없이 실천 없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로또 역시 사야 1등 당첨 확률인 814만분의 1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로또는 로또일 뿐이다. 진정한 노력은 그런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일본 미야기(宮城)대학 교수 히사츠네 게이치는 성공의 지름길을 “체념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완전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주목한 고대 그리스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의 완벽한 노력 사례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판테온 신전 지붕에는 서양 최고의 조각품들이 있다. 그 모두 피디아스의 작품이다. 피디아스가 조각을 완성하고 대금을 청구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해야 할 사람은 조각상 뒷면을 사람들이 볼 수 없기에 본래 조각할 필요가 없었다며 거부했다. 그 때 피디아스가 말했다. “신들이 보고 있습니다.” 드러커는 피디아스의 조각은 완전을 추구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았고, 피디아스의 완벽한 노력에 감동했다. 노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노력, 노오력, 노오오력, 노오오오력으로 경멸되는 시대일지라도 최선을 다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고통이 조금 더 길 뿐이다.


최선은 마음을 다하는 진심(盡心)


이순신은 묵묵히 최선을 다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 역시 3번의 파직, 두 번의 백의종군, 두 번의 사형 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언제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했다.


▲ 1592년 2월 22일. 아침에 공무를 처리한 뒤, 녹도(鹿島)로 갔다. 황숙도(黃叔度, 황승헌)가 같이 갔다. 먼저 흥양(興陽) 전선소(戰船所)에 도착했다. 배와 배에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점검했다. 그대로 녹도로 갔다. 곧바로 봉두(峯頭)에 새로 건축한 문루(門樓)로 올라갔다. 아름다운 경치는 관할하는 땅에서 최고이구나. 만호(萬戶, 정운)가 온 정성을 다한 모습이 모든 곳에 있었다. 흥양 현감(배흥립)과 황 능성(황숙도), 만호(정운)와 취하게 마셨다. 더불어 포(砲) 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觀). 촛불을 밝히고 한동안 있다가 파했다.


이순신이 시찰을 떠나 녹도에 도착했을 때의 일기다. 녹도는 오늘날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이다. 녹도를 관할하는 책임자는 정운(鄭運, 1543~1592) 장군이다. 이 날 일기에서 유심히 살펴볼 장면은 크게 네 가지 장면이다.


첫째는 전쟁 준비 상태를 직접 하나 하나 점검하는 이순신의 현장주의 자세이다. 둘째는 어디를 가든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이다. 셋째는 사람을 평가하는 원칙이 나타난다. 그는 “만호가 온 정성을 다한 모습이 모든 곳에 있었다”라고 했다. 이 내용은 능력주의와 결과주의가 아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즉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모습이다. 넷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필승의 무기였던 포(砲)의 등장이다.


이순신은 해적처럼 상대방의 배로 뛰어들어 칼부림하는 일본군의 전술을 간파하고 포로 일본군을 격파했다. 또한 당시 육지에서 조선군을 경악시킨 일본군의 주력무기였던 조총도 바다에서는 조선수군의 포와는 격이 달랐다. 조총도 실전 유효사거리가 50~60미터에 불과해 해전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비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갖고 있던 포는 다양했고, 위력적이었다.


대포로는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0·황자(黃字)총통이 있었고, 개인용 화기로는 승자(勝字) 총통을 사용했다. 천자총통은 세종27년(1445년)에 처음 실록에 등장한다. 세종이 4~5백보 정도 나가던 기존의 천자화포를 개량하게 해 화살을 1천 3백여 보를 날아가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천자총통은 길이 130cm, 구경 13cm, 무게 300kg, 사거리 1.6km~2km이고, 대장군전(30kg)과 철환(400발)을 쏘았다. 지자총통은 길이 88cm, 구경 10.3cm, 무게 100kg, 사거리 1km로 장군전과 철환(200발)을 쏘았다. 현자총통은 길이 80.5cm, 구경 5.7cm, 무게 59kg, 사거리는 차대전은 960m, 차중전은 1.8km였고, 철환 100발을 발사했다, 황자총통은 가장 작은 대포로 길이 88cm, 구경 4.4㎝, 무게 53kg, 사거리 1.3km, 차중전과 철환(40발)을 쏘았다. 승자총통은 개인용 화기로, 길이 56cm, 구경 2.2cm, 무게 3~4kg, 사거리 120m, 철환을 쏘았다.


승자총통을 포함한 이순신 수군의 포는 조총의 사거리에 비해 최대 20배, 최소 2배 정도로 길었다. 훗날 실전에서 이순신 수군이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창고에 넣어버린 신문기 조총


일본에 조총이 전해진 것은 1543년 경이다. 태국을 출발해 중국으로 가던 배 1척이 규슈 근처 다네가시마에 표류해 도착했는데, 그 때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이 조총을 전해 주었고, 그 후 조총은 일본 역사를 바꾸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끈 연합군이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다케다 가츠요리의 기마부대를 대파했고, 이후 칼과 함께 일본의 주력무기가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1589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平義智)가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러 왔을 때 공작새 두 마리와 조총 등를 바쳤는데, 조총은 군기시 창고에 넣어두게 했고, 공작새는 경기도 남양 앞바다 섬에 풀어놓게 했다고 한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1590년 3월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갖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589년이든 1590년이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3~4년 전이다. 그럼에도 최신 무기인 조총을 조선에서는 창고 속에 넣어두고 전쟁을 맞았다.


이순신이 조총의 존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순신 방식으로 혁신적인 거북선을 만들었고, 이날의 일기처럼 주력 무기로 대포를 중요시했다. 전쟁 발발 후 혁신 리더 이순신의 거북선과 대포는 기적을 만들었다. 반면 이순신과 똑 같은 상황에 맞닥뜨린 조선의 나머지 육군이 전쟁 초기에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으로 일본군을 공격해 승리한 기록은 사실상 거의 없다. 기존에 있던 무기조차 사용하지 못했다. 이 사례는 리더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스스로 혁신하는 리더와 틀에 갇힌 리더의 차이다. 미래를 내다보려는 리더와 어제와 오늘만 바라보는 리더의 차이다.


1592년 2월 22일은 양력 4월 4일이다. 남도에 봄이 한창 시작될 무렵이다. 이순신은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 또 현장 점검과 사실 확인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부하장수의 모습에 기뻐하며 함께 취했다. 목숨을 걸고 노력한 뒤, 기쁨에 마시는 한 잔의 술만큼 단 술이 어디 있을까.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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