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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2] 전선 12척
일요서울 입력 2016-04-18 10:06 승인 2016.04.18 10:06 호수 1146 49면
- 때로는 죽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상 ‘물표가늠’ 현대판 GPS 기능 장착
<전남 목포 고하도 모충각>
살다 보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죽어도 안 되는 일이 많다. 사람들은 그 때마다 다 다르게 행동한다. 어떤 때는 탄식도 하고, 어떤 때는 쉽게 던져버리고 잊기도 한다. 이순신을 상징하는 말의 하나가 명량해전 이전에 했던,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말이다. 그 말은 보통 사람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엄청난 말이다. 낙관주의의 화신과 같은 이순신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난중일기》 속 이순신의 하루하루에는 평범한 우리처럼 똑같이 한숨을 내쉬며 답답해하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또 때로는 허탈하게 웃는 모습도 나온다.
어찌하랴, 우스운 일이다.
▲ 1592년 2월 25일. 흐렸다. 각 항목의 전쟁 준비에 탈 난 곳이 많았다. 군관과 색리들의 죄를 처벌했다. 첨사(김완)를 잡아들였고, 교수는 내보냈다. 방어 준비가 다섯 포 중에서 최하였다. 그런데도 순찰사(이광)가 “임금님께 상을 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아뢰는 글”을 올렸기에, 죄를 조사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었다. 출항할 수 없었다. 그대로 묵었다.
▲ 1592년 2월 26일. 아침 일찍 출항해 개이도에 도착했다. 여도 배와 방답이 마중 나온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방답에 도착했다. 공사례(公私禮)를 마친 뒤, 군기물을 점검하고 검열했다. 장전과 편전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슴만 탔다. 전선(戰船)은 두 번째로 우수했다. 기쁘다.
▲ 1592년 2월 27일. 흐렸다.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 북봉에 올라갔다.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고 둘러보았다. 고립되고 위험하게 단절된 섬이다. 모든 방향에서 침입을 당할 수 있다. 게다가 성과 해자도 아주 엉망이었다. 걱정이다. 걱정이다. 첨사가 온 정성을 다했어도, 시설이 완성되지 못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늦게 배를 타고 경도에 도착했다. 동생 여필과 조이립, 군관과 우후가 술을 싣고 나와 맞이했다. 같이 즐겁게 놀았다. 해가 저물 관아로 돌아왔다.
이곳저곳 관할하는 지역의 전쟁준비 상황을 바삐 점검했다. 어느 곳은 잘 되었고, 어느 곳은 부실했다. 잘못한 곳의 책임자는 처벌했고, 잘 한 곳은 칭찬했다. 어쩔 수 없는 곳은 어쩔 수 없는데로 상황을 인정했다. 때로는 이순신처럼 “어찌하랴 어찌하랴”라고 탄식하며 당장 할 수 없는 일은 그냥 던지다.
역사의 아이러니 이순신의 자리, 원균의 자리
그 때도 눈이 먼 높은 사람들이 있었다. 25일, 이순신은 제대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은 사도 첨사 김완 때문에 아주 많이 화가 났다. 자신이 관할하는 5포(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 중에서 가장 부실한데도 거꾸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보고서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관료들에 대한 인사평가제도가 있었다.
‘포폄(褒貶)’이라고 한다. 매년 6월과 12월에 두 차례 평가를 했다. 25일 일기처럼 지방의 수령들은 순찰사(관찰사, 감사)가 했고, 평가는 상·중·하의 3등급이었다. 중급이나 하급을 맞으면 사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중급을 3번 맞으면 파직되었다. 하급으로 면직된 사람은 2년이 지나야 재임용될 수 있었다.
인사평가 기준은 고을 수령의 경우는 ‘칠사(七事)’가 있다. 관할 지역의 백성들이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써 잘하게 하도록 하는 것, 인구가 늘어나게 만드는 것,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잘 시키는 것, 군대·군사 문제를 잘 관리하는 것, 부역을 공평히 부과하는 것, 재판 건수가 줄도록 만드는 것, 아전들이 부정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수사 아래의 수군 장수는 관찰사와 수사가 함께 토의해 인사평가를 했다. 유희춘의 1571년 7월 28일 일기에는 전라관찰사 유희춘과 전라 병마사, 전라 좌수사, 전라 우수사가 함께 모여 인사평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관찰사와 수사들은 각자 근거를 들어 첨사와 만호에 대한 인사평가를 했고, 의견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선조실록》에는 원균과 관련한 인사평가 이야기가 나온다. 이순신이 1591년 2월,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1591년 1월 5일, 신임 전라 좌수사에 이유의(李由義)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2월 8일 기록에는 전라 좌수사로 원균이 언급된다. 이유의가 임명되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원균으로 교체된 듯하다. 2월 8일의 실록 기록은 사간원이 원균을 탄핵해 전라 좌수사 임명 취소가 되는 내용이다. 사간원이 원균을 반대한 핵심이 바로 인사평가 결과이다. 사간원은 원균이 수령으로 있을 때 하등급을 맞았다며 좌수사 임명을 반대했다.
전라 좌수사 직은 원균 대신 유극량이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사헌부가 유극량의 집안이 좋지 않아 지휘통솔력이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이순신이 임명되었다. 이순신도 처음에는 원균을 탄핵했던 사간원에서 거듭 반대해 좌수사 임명이 무산될 뻔했다. 사간원에서 이순신을 반대한 이유는 갑작스런 승진 때문이었다. 원균처럼 인사평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선조는 “인재가 모자라다”며 임명을 강행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없지만, 원균이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다면, 사간원 반대에 동의해 선조가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만 해도 손에 진땀이 날 일이다. 2월 25일 일기 속의 인사평가 문제와 관련해 김종의 1592년 2월 7일과 3월 6일 일기에도 관찰사 이광이 책임지던 전라도 지역 인사평가 이야기가 나온다. 이광의 인사평가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듯한 뉘앙스다. 그러나 김종의 일기에는 이순신 관할 지역의 장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일기 속 용어와 지명
교수(敎授)는 각 지방 향교의 학생을 가르치고, 수령을 보좌했던 종6품 문관이다. 다른 번역본과 달리 설의식은 교수를 직책이 아닌 일종의 훈계로 보았다. 개이도에 대해 노기욱은 오늘날 전남 여수시 화정면 다도 또는 추도(鰍島)로, 설의식은 “싸리섬(楸島, 추도)”라고 보았다. 북봉은 방답진 봉수가 있던 전남 여수시 돌산읍 둔전리 봉수마을 뒤 봉화산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의전은 아주 복잡했다. ‘공사례(公私禮)’는 조선시대 관리들이 업무를 보기 위해 관청에 나갔을 때 상하급 관리들이 서로 인사하는 절차이다. 공례는 관료가 관복을 입고 최상급 관리는 북쪽, 그 다음은 동쪽, 서쪽 순으로 자리를 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나아가 두 번 절을 하되 상급자는 맞절을 하지 않는다. 공례가 끝난 뒤에 별도로 서로 읍(揖)을 하는 것이 사례이다.
이순신은 주로 배를 타고 시찰을 했는데, 조선시대 선장들은 바다에서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알았을까. 주강현의 《관해기(1)》에 따르면, ‘물표가늠’을 써서 위치 확인했다고 한다. 즉 “먼 산과 가까운 산 등을 연결하여 자신의 위치를 삼각구도로 알아내는” 방식이다. GPS가 없던 시대의 민속지식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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