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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7] 장군의 칼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입력 2016-05-30 09:16 승인 2016.05.30 09:16 호수 1152 49면 


- 현충사 장검은 사용하지 않은 의장용 칼

- 장군의 칼 ‘원용검’ 일본 불법 소장 가능성


<원용검(쌍룡검), 조선미술대관 1910>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보물 제326호인 이순신의 두 자루 장검에 각각 새겨진 검명, 즉 칼 이름이다. 그 뜻은 “석 자 장검 높이 들어 푸른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 “단 칼에 더러운 무리 깨끗이 쓸어버리니, 산과 바다가 핏빛으로 물드는구나”이다. 천하를 평정한 이순신의 웅혼한 기상이 보인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은 《난중일기》 속의 메모와도 거의 일치한다.


▲ “尺劍誓天 山河動色(척검서천 산하동색. 한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1593년 9월 15일 일기 다음 메모)


이 메모는 류성룡이 쓴 악비의 전기 《정충록》의 발문 속의 문장이기도 하다. 척검(尺劍, 한 자 칼)과 삼척(三尺, 세 자 칼)의 차이만 있다. 현충사 장검은 실제 길이가 약 2미터, 무게 약 4.3킬로그램이다. 조선시대의 다양한 자, 즉 황종척, 주척, 포백척을 기준으로 하면, 5.7척, 9.6척, 6.4척, 4.2척으로 삼척검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다.


그런데도 이순신이 삼척이라고 했던 것은 당시의 실제 칼이 거의 대부분 삼척이었고, 칼을 은유적으로 사용할 때 삼척검이라고 불렀기 때문인 듯하다. 삼척검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례는 한(漢) 창업자 유방이다. 그는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삼척검을 들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천명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었겠는가”라고 했다.


보통 사람은 현충사 장검을 한 손으로 들기 어렵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엄청난 장사이거나 거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칼을 연구할 결과에 따르면, 실제 사용한 흔적이 없고, 크기와 무게로 볼 때 의장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칼에는 “갑오년(1594년) 4월, 태귀련·이무생이 만들었다”고 한다. 태귀련은 《난중일기》에서 태구련으로도 나오고, 이순신에게 환도를 바치기도 했다(1595년 7월 2일).


▲ 1592년 3월 6일.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나가 좌기했다. 군대 물건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점검했다. 활과 갑옷, 투구와 화살통, 환도가 깨지고 훼손된 것이 많았다. 제 형태를 갖추지 못한 것이 아주 많았다. 담당 색리와 궁장, 감고 등의 죄를 따졌다.


이 일기에 처음 칼이 등장한다. ‘환도(環刀)’가 그것이다.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의 칼은 ‘장검(長劍)’으로 불리는데 반해 여기서는 환도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칼은 보통 검(劍)과 도(刀)로 구분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혼용해 사용했다. 검과 도의 차이는 검이 양쪽에 칼날이 있고 찌르는 것을 위주로 한다면, 도는 칼날이 한 쪽 면에만 있고 베는 것을 주로 한다는 것이다. 현충사 장검도 검과 도로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에 다르면 칼날이 한쪽에만 있기에 ‘도’로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 ‘장검(長劒)’으로 명기하고 있기에 장검으로 불린다.


사라진 두 자루 칼, 원융검(쌍룡검)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의 칼 이외에도 다른 이순신의 칼이 있을까. 현재 존재하는 다른 칼은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명나라 신종에게 받은 귀도 2자루와 참도 2자루가 있다. 현충사 장검을 포함해 총 6자루가 확인된다.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의 칼이라고 전해지는 별도의 2자루도 있었다. 원융검 혹은 쌍룡검이라는 칼이다. 실물 사진은 1910년에 궁내부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유물을 조사·편찬한 《조선미술대관》에 ‘원융검’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다음은 원융검에 대한 해설문이다.


▲ 본국(조선)의 도검은 임진역(임진왜란)에 수군을 이끌고 우리 군(일본군)과 힘써 싸웠던 명나라(明)의 이순신이 항상 찼던 것으로 왼쪽의 문자가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다. ‘鑄得雙龍劒, 千秋氣尙雄,盟山誓海意,忠憤古今同(쌍룡검을 만들었으니, 아주 오랜 세월까지도 기운은 오히려 웅혼하겠구나.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서한 뜻,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상자에는 (글이) 조각되어 이 일을 기록했는데, 이 물건은 진실로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국과 일본 역사에서 관계가 깊기에 특별히 참고할 수 있도록 실었다. 이 해설문에 따르면 원융검은 이순신의 칼이다. 그 근거는 상자에 새겨진 글 때문으로 보인다. 그 글은 현재는 실물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 후기의 무신 박종경의 《돈암집》에 나오는 <원융검기>가 새겨진 듯하다. 박종경이 1811년에 원융검을 얻은 과정에서 이순신의 칼이라는 이야기와 원융검이라는 명칭, 위의 시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원융검 대신 흔히 알려진 다른 명칭인 쌍룡검은 검에 새겨진 시 때문이다.


이 칼의 존재가 구한말 언론에 처음 보도된 것은 《조선미술대관》에 실리기 전인 1909년 9월 19일 《대한민보》이다. 친위부(군부)에서 소장하고 있던 이충무공의 군도(軍刀)가 동궐내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는 기록이다. 이 때 함께 출품된 물건의 하나가 창해역사가 진시황 암살을 시도할 때 썼던 철추이다. 장량의 암살 시도에 참여한 바로 그 창해역사와 그의 철추이다. 이 철추 사진도 《조선미술대관》에 나온다.


이순신의 칼과 철추는 《황성신문》 1909년 10월 27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키치너 장군(Horatio H. Kitchener)에게 잠시 빌려주기도 했었다. 《대한민보》 1909년 11월 6일 기사에서는 키치너가 철추를 보고 돌려준 뒤 일본군 사령부가 다시 그것을 보겠다가 가져갔다고 한다. 그 후 이순신의 칼이 등장한 기록으로는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25일 논설 기사와 4월 12일의 영은생의 시조이다. “박물관에 소장된 장검”, “충무공이 쓰던 칼”이라고 창경궁 박물관에 소장된 이순신 칼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장검 혹은 칼이 원융검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권업신문》 1912년 5월 26일의 기사에는 “철추와 이순신의 원융검을 일본인들이 치워놓아 볼 수 없다”고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15년 4월 29일 기사에는 창덕궁 박물관 유물로 철추가 언급되지만, 칼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김정규(金鼎奎, 1881~1953)의 1910년 음력 2월 9일(양력 3월 19일) 일기에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 국보(國報)에 따르면, 즉 군부(軍部)를 폐지한 뒤 얼마간의 군물(軍物)을 그대로 일본 박물원(博物園)으로 옮겼는데, 충무공 이순신이 쓰시던 군물(軍物)도 옮기는 중으로 왜(倭)로 보낸다고 했다.


‘국보(國報)’는 정확히 어떤 매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항상 어떤 전거를 밝히고 일기를 쓴 김정규의 기록을 보면, 일본은 1910년 봄에 해체된 조선 군부의 각종 무기와 갑옷 등의 유물은 물론 궁내부 박물관에 소장된 이순신의 유물, 즉 원융검(쌍룡검)도 일본이 가져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융검이 이순신의 칼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일제가 우리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많이 가져간 것은 사실이다. 가장 먼저 우리의 문화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먼저 찾아내고, 적극적으로 반환받기 위해 노력할 때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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