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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8] 장군의 생일

일요서울 입력 2016-06-07 08:57 승인 2016.06.07 08:57 호수 1153 49면 


- 1592년 3월8일 내내 비만 내린 생일

- 1594년 생일 말못할 정도 심신이 쇠약



생일을 축하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특히 자신은 물론 낳아주신 어머니에게 감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이 자신의 생일을 언급한 기록이 있을까. 

다음은 1592년 음력 3월 7일부터 11일까지 일기다.


▲ 1592년 3월 7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 1592년 3월 8일. 비가 내내 계속 내렸다.

▲ 1592년 3월 9일. 비가 내내 계속 내렸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 1592년 3월 10일. 맑았으나,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 1592년 3월 11일. 맑았다.


생일날 차례를 지낸 조선 사람들


이 날 중에 이순신의 생일이 있다. 그런데 생일이라고 했거나, 혹은 생일 느낌이 나는 일기는 전혀 없다. 이순신의 생일은 “비가 내내 계속 내렸다”고 간략히 날씨만 기록한 3월 8일이 다. 이는 아마도 친필초서 일기가 아니라, 《이충무공전서》에만 있는 일기이기 때문인 듯하다. 《이충무공전서》에만 있는 일기인 1595년 3월 8일도 비슷하다. 생일날이란 느낌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기가 존재하는 1593년, 1594, 1596년의 경우는 생일날 분위기가 느껴진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생일날 무엇을 했을까. 오희문의 일기가 기록된 《쇄미록》은 특히 자세하다.


오희문은 생일날에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이는 곧 어머니께서 고생하신 날이다(1592년 7월 25일)”, “오늘은 곧 내 생일이다. 누님이 떡을 쪄 신주(神主)께 먼저 올리고 나에게 큰 그릇에 하나를 주셨다(1593년 7월 25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상화떡과 양색탕(兩色湯), 꿩 구이, 여섯 가지 색깔의 과일 등으로 신주에 제사를 지냈다. 윤겸(오희문의 아들)의 편지에는 오늘 도사(都事)가 현(縣)에 온다는 기별을 해왔기에 찾아뵙지 못하고, 도사가 떠난 뒤에 개고기를 마련해 올 것이고, 그 때 최판관과 이토산을 불러 오겠다고 했다(1597년 7월 25일)”, “내 생일이다. 간신히 당말(糖末) 5되로 떡을 찌고, 술과 과일로 차례를 지냈다(1600년 7월 25일).”


오희문은 “어머니께서 고생하신 날”로 생일의 의미를 보여주고, 제사를 지내고, 떡을 쪄서 먹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아들 오윤겸은 오희문의 생일날이라고 특별히 개고기를 마련하는 모습이다.


남평 조씨의 《병자일기》에도 생일 기록이 나온다. “생일이기에 차례를 지냈다(1637년 9월 10일)”, “영감의 생신날이다. 3년 만에 가족들이 모여 생일을 지내니 아주 다행이다. 그러나 자식이 생각나니 무엇을 해도 슬픔이 끝이 없다(1639년 3월 25일).” 오희문의 일기에서는 일반적인 제사를 지내는 모습인데 반해 남평 조씨는 ‘차례’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 일기들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생일을 낳아주신 어머니께 감사를 드리고 기념하는 날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들과 달리 조상들에게 감사의 인사로 차례를 지냈다는 점이다. 우리들처럼 명절 때만 차례를 지낸 것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생일을 맞은 이순신


이순신의 일기 중에 생일날인 3월 8일의 다른 해 일기를 보자.


▲ 1593년 3월 8일. 맑았다. 한산도로 되돌아왔다. 아침을 먹은 뒤, 광양 현감과 낙안 군수, 방답 첨사가 왔다. 방답 첨사와 광양 현감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왔다. 우수사가 왔다. 어란포 만호가 소고기로 만든 음식물을 보냈다. 저녁에 비가 계속 내렸다.


▲ 1594년 3월 8일. 맑았다. 아픈 것은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게다가 마음도 고단했다. 내내 고통스러웠다.


▲ 1595년 3월 8일. 맑았다. 식사를 한 뒤,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두 조방장과 우후, 가리포 첨사와 낙안 군수, 보성 군수와 광양 현감, 녹도 만호가 함께 왔기에 모여서 이야기 했다.


▲ 1596년 3월 8일. 맑았다. 아침에 안골포 만호가 큰 사슴 1마리를 보내왔다. 가리포 첨사도 보내왔다. 식사를 한 뒤에 나서서 좌기했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좌수사와 가리포 첨사, 방답 첨사와 평산포 만호, 여도 만호와 우우후, 경상 우후와 강진 현감 등이 왔다. 같이 내내 곤드레만드레 취해 파했다. 저녁에 비가 잠시 내렸다.


오희문이나 남평 조씨처럼 자신의 생일이라고 명시한 경우는 없다. 또 차례를 지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1593년과 1595년, 1596년의 일기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소고기 혹은 사슴고기를 함께 먹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나온다. 이순신의 생일이라는 배경을 모르고 이 일기들을 읽으면, 이순신이 전쟁 중에도 마치 잘 먹고 잘 지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장면이다.


특히 1593년 생일날은 전투를 막 끝내고 잠시 쉬던 날이다. 이순신은 2월 6일 전라 좌수영에서 출전했다. 2월 7일에 견내량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 부대와 합쳤고, 2월 8일에는 전라 우수사 이억기 부대가 합류했다. 조선수군연합함대는 경상도 웅천 웅포에 있는 일본군을 2월 10일과 12일, 18일, 20일, 22일, 3월 6일에 각각 공격했다. 그러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위력에 겁을 먹고 전투를 계속 회피했다. 지루한 싸움이었다. 성과도 적었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한 달 이상을 경상도 바다와 섬을 떠돌며 전투와 휴식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순신도 장수들도, 군사들도 모두 피로에 절어 있던 시기였다. 바로 그 때 이순신의 생일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할 시점이었다. 1593년 3월 8일, 장수들은 이순신의 생일을 핑계로 함께 모여 술 한 잔, 고기 한 점을 함께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8일 어란포 만호가 보낸 ‘소고기’를 이순신은 《난중일기》 원문에서는 ‘도림(桃林)’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경》에는 도림과 관련된 고사가 나온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폭정을 했던 상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킨 뒤에 전쟁에 썼던 “말은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풀어 보내고(歸馬于華山之陽),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 놓겠다(放牛于桃林之野)”고 한 이후 소가 도림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무왕이 말한 의미는 전쟁의 종료이다. 이순신이 한자 소 우(牛)를 쓰지 않고 도림으로 표현한 것은 한 달여 동안 계속된 지루한 전투, 전쟁을 하루 빨리 끝냈으면 하는 속마음이 담긴 것이 아닐까.


1594년 생일에는 1월부터 전염병이 만연해 장졸들이 많이 사망하거나 병들어 신음을 했던 때다. 이순신 역시 전염병에 걸린 듯 계속 아팠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일본군 전선의 출현 소식에 바로 출전해야 했다. 3월 4일과 5일에는 당항포에서 일본 전선 총 31척을 격파했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전투를 했고, 일본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3월 6일, 명나라 명나라 도사부(都司府) 담종인(譚宗仁)은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문서를 보냈다. 이순신은 그 날 “몸이 아주 불편해 앉고 눕는 것도 어려운”상태였다. 7일에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몸을 일으켜 담종인에게 반박문을 써서 보내고, 한산도로 돌아왔다. 8일, 생일에는 일기에 더 쓸 말도 없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상황도 모두 좋지 않았다. 1595년과 1596년의 생일 즈음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1596년의 경우는 오희문의 일기로 보면 명절인 한식날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순신도 평안히 생일에 부하장수들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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