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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50] 백의종군
일요서울 입력 2016-06-20 08:52 승인 2016.06.20 08:52 호수 1155 49면 댓글 0
- 옥문 나선 장군 “晴(맑았다)” 한글자 일기
- 이광수, 소설 속 고문 당하는 장군 묘사
▲ 18세기 전주부지도중 원형옥 부분(서울대 규장각)
▲ 1592년 3월 11일. 맑았다(晴).
한 글자 일기이다. 이순신의 일기 중에서 “晴((맑았다)”이라는 한 글자 일기는 총 30회 나온다. 이 날 이전의 한 글자 일기로는 2월 18일의 ‘陰(흐렸다)’가 있다. 《난중일기》에서 날씨와 관련해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일기는 다음 일기이다.
▲ 1597년 4월 1일(양력 5월 16일). 맑았다(晴). 원문(圓門, 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사내종 집에 도착했다. …… 술에 취했고, 땀이 나 몸이 젖었다.
1597년 4월 1일은 이순신이 3월 4일 옥(獄)에 갇힌 뒤 28일 만에 백의종군 명령을 받고 풀려난 날이다. 이순신이 체포되기 전, 조정에서 한 회의 내용을 보면,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체포될 때, 그의 눈앞에는 죽음밖에 없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의 기록에는 선조의 생각이 분명히 드러난다. “비록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 와도 용서할 수 없다”, “이순신을 조금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5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하며 불패의 장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라의 죄인이 되었다. 게다가 지존(至尊, 임금)은 그를 사형시키려고 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하루하루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았던 이순신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일기의 4월 1일은 양력으로 5월 16일이다. 그날 그는 옥에서 나오자마자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때 얼마나 눈이 시렸을까. 또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4월 1일의 일기 시작, “晴(맑았다)”에는 그의 아픔이 담겨 있다.
4월 1일 일기 속 원문(圓門)은 흔히 옥문(감옥문)이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정확히는 한문 그대로 원문이다. 이 원문은 우리나라 전통 옥(獄)의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각종 고지도를 살펴보면, 옥은 대부분 다른 관아 건물들과 달리 원형 담장을 둘러치고, 그 안에 옥사를 두었다. 송나라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고 쓴 《고려도경》에도 원형 담장의 옥이 언급된다. “높고 튼튼한 담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고리 담처럼 생겼다(形如環堵). 가운데에 건물이 있고 옛날 환토(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형의 제단)와 비슷하다.”
이순신이 갇혔던 옥은 조선시대 법과 갇힌 경위로 보면, 의금부 옥일 가능성이 높다. 의금부에서는 왕족의 범죄, 반역모반 등의 중죄, 삼강오륜 범죄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의금부 옥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 앞에 있는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자리에 있었다.
혹독한 고문의 진실
이순신은 고문을 얼마나 심하게 받았을까. TV드라마 혹은 영화에서는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이순신이 단골로 등장한다. 이순신이 심한 고문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사료로는 이순신의 사형을 면하게 해 주었던 글인 정탁의 <신구차>가 있다. 정탁은 자신이 죄인을 문초했을 때, “한 번 신문을 하고 나면 그대로 몸이 상해 쓰러진 사람이 많았고, 목숨이 끊어진 경우도 많았다”는 경험을 말하면서, 이순신의 경우는 이미 “한 차례 형벌이 있었고”, “만약 다시 형벌을 하면 엄한 문초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이덕형도 이순신이 “고문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순신이 문초를 당한 날짜는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 따르면 3월 12일이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3월 12일에 한차례 고문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고문의 정도는 정탁이나 이덕형의 기록과 달리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4월 1일 일기와 그 이후의 백의종군 과정을 보면, 혹독한 고문의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소설 이순신》에서 잔인한 고문에 시달리는 이순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나졸들은 순신의 상투를 뽑아 잔뜩 뒷짐에 비끄러매고 주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순신의 두 다리의 살은 터져 피가 흘렀다. 정강이뼈는 휘었다. 그러나 굳게 닫힌 순신의 입은 영원히 닫힌 듯이 열리지 아니하였다. 주리를 틀어도 효과가 없는 것을 보고 단근질을 시작하였다. 뻘겋게 달은 인두는 순신의 넓적다리를 부쩍부쩍 지졌다. 기름이 타고 피가 흘렀다. 순신의 전신은 이길 수 없는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조금도 찌그림이 없었다. …… 이 모양으로 여드레나 두고 계속하여 국문하였으나 순신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이광수, 《소설 이순신》)
그러나 실제로 이순신이 이광수의 묘사처럼 9일이나 연이어 고문을 당했다면, 백의종군을 위한 이동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옥을 나온 날, 맑은 하늘은 이순신에게 그저 그런 하늘이 아니었을 것이다. 원망과 분노, 서러움과 슬픔이 뒤범벅된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선의 엔진, 격군
▲ 1592년 3월 12일. 맑았다. 식사를 한 뒤, 나가 배로 갔다. 경강선(京江船)을 점검했다. 배를 타고 소포로 나아갈 때, 동풍이 크게 불었다. 격군(格軍)도 없어 되돌아왔다. 곧바로 동헌에 좌기했다. 훈련용 화살 10순을 쏘았다.
이날 일기의 “경강선(京江船)을 점검했다”의 원문은 “點京江船”이다.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다. 전남대 노기욱 박사의 번역이 가장 편차가 크다. 그는 경강선(京江船)의 경강을 좌수영 근처의 지명으로 보고, “경강(전남 여수시 봉산동)에서 배를 점검했다”라고 했다. 반면에 기존의 대부분의 번역에서는 경강선 자체로 본다. 경강은 하영휘의 《옛편지 낱말사전》에 따르면, “서울 뚝섬에서 양화도(楊花渡) 사이의 한강”이다. 때문에 경강선은 서울 한강에 근거를 두고 각 지방을 왕래하는 배로 볼 수 있다.
격군(格軍)은 ‘곁군’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쓴 것이다. 배의 노를 젓는 군사다. 오희문의 1594년 2월 1일 일기에서는 노군(櫓軍)으로도 나온다. 김성준의 《배와 항해의 역사》에서는 격군과 다른 사공이 나온다. 사공은 선원의 우두머리로 키를 잡고 항로를 조종하는 선박운항 책임자이다. 사람의 힘으로 배를 운항했던 시대에 격군은 배의 엔진과 같은 역할을 했다. 민초였던 격군 없이 이순신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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