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ispy.d_0001_0020_0030
조선시대 평양성
평양성은 고려말 홍건적의 침략으로 무너졌고, 조선 태조 2~3년에 복구되었다. 그리고 조선 태종 9년에 수축한 둘레 4,088보의 읍석성과 태종 6년에 개축한 돌로 쌓은 둘레 24,539척의 내성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內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만 4천 5백 39척이요, 높이가 13척이다. 문이 6개인데, 동은 장경(長慶), 서는 보통(普通), 남은 함구(含毬), 북은 칠성(七星), 정동은 대동(大東), 정남은 정양(正陽)이라 이른다. 우리 태종 6년(1406)에 고쳐 쌓았다. 외성은 당포(唐浦) 위에 있는데, 돌로 쌓은 것은 둘레가 8천 2백 척이고, 흙으로 쌓은 것은 1만 2백 5척이요, 모두 높이가 32척이다. 두 문이 있는데, 남을 거피(車避), 서를 다경(多景)이라 한다. [주18]
평양성의 규모를 조선 세종 때 營造尺(31.24cm)과 布帛尺(46.73cm)로 계산 해 보면 내성은 둘레가 7,666~11,467m, 높이가 약 4~6m 이고, 외성은 5,750~86,006m, 높이가 약 10~15m가 된다.북한에서 조사한 평양성은 『조선유적유물도감』에 따르면, 외곽성의 둘레가 약 16km이며, 각 부분을 나누는 성벽까지 포함하면 23km라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평양성 현황에 대하여 명확히 구분된 바가 극히 드물어 문헌적 고찰의 한계를 절감한다.
윤두수 『평양지』에는 府城으로 되어 있다. 태종 때 개축 시기에 차이가 있지만, 개축이 태종 6년에 시작하여 9년에 완공된 것을 의미한다. 태종 때 개축된 부성(읍성, 내성)은 정동문이 大東門, 동문이 장경문, 서문이 보통문, 정남문이 정양문, 남문이 함구문, 북문이 칠성문이었다. 大東門은 大同門과 같은 문으로 판단된다. 정리하면 조선태조는 홍건적에게 파괴된 고려 서경의 舊城 즉 內城을 복구하였으며, 태종은 그것을 이어받아 개축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조선 전기 읍성, 부성, 내성으로 불려진 이 성과 각 문들은 고려말 서경성 내지 평양성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세종실록』과 『고려사』의 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평양에는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읍석성 말고, 古城터가 둘 있었다. 하나는 기자 때 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쌓은 것이라 한다. 기자 때 쌓은 설을 소개한 『여지승람』의 외성과 같은 것이니, 그 남문은 거피문, 서문은 다경문이었다. 물론 외성과 기자와 관련설은 조선 지식인의 생각일 뿐 근거가 없다. 고려 성종 때 서경에 성을 쌓은 기록이 없어 신빙성이 없지만, 고려 때 성이며, 현종 대 쌓은 황성의 남벽으로 판단된다.
고려말~조선전기 평양에는 서경성으로 기능하다가 홍건적에게 불타고 조선 전기에 복구되어 평양부의 부성으로 기능한 내성이 존재했으며, 그 바깥 쪽에 외성이, 그 안쪽에 황성의 남벽이 기능을 상실하여 폐허 상태의 고성(古城)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인조 2년(1624)에 부성(내성)이 커서 지키기 어려워 그 서 남폭을 축소 개축하여 그 안의 북쪽에 새로운 부성(내성)을 건축하였다. 내성에는 성문이 5개소로 대동문, 주작문(남문), 정해문, 칠성문, 장경문이며, 각 성문에는 문루(門樓)가 부벽루(相灝樓), 초연대(超然臺), 반구정(反求亭), 연관정(鍊光亭)이 있다. 성 내 중요시설물로는 상아(上衙)·이아(二衙)와 중영 건물(中營 建物), 무기고(武器庫)와 창고(倉庫) 등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부성(내성) 중 새로운 부성(내성)을 제외한 남쪽 부분은 中城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중성과 그 남문으로 전환된 정양문, 함구문은 보존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너져 옛 터로 남게 되었으며, 외성은 방치되어 황폐의 정도가 더 심해졌다. 새로운 부성(내성)은 ‘개축’이라 표현되었듯이 북동서벽은 기존 내성의 성벽을 이용하였으며, 남벽은 고려 고성 즉 황성의 남벽터를 바탕으로 하였다고 여겨지는데, 서남쪽은 서남 폭의 축소를 강조한 점으로 보아 약간 더 축소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북성이 조선 숙종 40년(1714) 새로운 부성(내성)의 북쪽에 창축되었다. 문루(門樓)인 부벽루(浮碧樓)와 을밀대(乙密臺)가 있고, 성 안에는 영명사(永明寺)와 문무정(文武井) 및 고구려 동명왕 설화와 관련 있는 기린굴(麒麟窟)이 있다 북성을 건축한 이유는 모란봉 지역을 적에게 점령당하면 내성이 위험해 진다는 것이었으며, 이 성을 쌓는 과정에서 옛 성이 발견되었다. 북한 연구자들은 이러한 점을 가지고 북성은 고구려 때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역시 같은 이유로 고려 때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데, ‘창축’이라 되어 있지만, 많은 부분은 고려 때 성터를 활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북성이 건축된 이후 1732년(영조 8)에 토성을 증축하였다. 그 성안에는 함구문과 정양문 등 성문과 일영지(日影池)와 월영지(月影池) 등 연못이 있다. 조선후기 평양성은 제 기능을 발휘한 새로운 부성(내성)과 북성, 그리고 황폐화되어 간 중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주
주 018 城郭
內城 石築周二萬四千 五百三十九尺 高十三尺 門六 東曰長慶 西曰普通 南曰含寇 北曰七星 正東曰大東 正南曰 正陽我 太宗六年改築
外城 在 唐浦上石築周 八千二百尺 土築 一萬二百五尺 竝高三十二尺 有二門 南曰車避 西曰多景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1, 平安道, 平壤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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