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01112/1/BBSMSTR_000000010417/view.do
<94>동학전쟁과 청일전쟁의 발발은 날씨 때문
기후와 역사 전쟁과 기상
기사입력 2010.11.12 00:00 최종수정 2013.01.05 06:05
19세기말 엘니뇨 극성… 전세계 떼로 굶어 죽어
전봉준 동상.
동학농민전쟁 그림.
동학농민군의 2차 진격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성악가 조수미가 부르는 파랑새를 들으면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일본 침탈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네 농민군이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는 광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동요는 동학농민운동(1894) 때 불렸다고 전해진다. 동요에서 파랑새는 푸른색 군복을 입은 일본군을 뜻하며, 녹두밭은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자. 19세기 말 엘니뇨가 극성을 부리면서 전 세계의 가난한 나라 백성들이 떼로 죽어나갔다. 특히 1877년과 1878년에 발생한 강력한 엘니뇨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큰 가뭄을 가져왔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인도와 중국에서만 2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대기근 사태를 방관했고 중국의 청나라는 국민을 구휼할 재정이 없었다. 민중과 농민들은 처참한 기근 앞에 무기력하게 죽어갔다. 이런 형편은 우리나라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아프리카 동남부의 무수한 반란을 포함해 중국의 의화단운동, 한국의 동학농민운동, 힌두교 민족주의의 부상, 브라질의 카누두스 전쟁이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에 의해 발생했음을 명확히 했다.”(R. B. 마르크스)
“조선에서는 1884년 강력한 대가뭄부터 가뭄의 정점이었던 1901년은 38년과 124년 주기 가뭄이 겹쳐 전국적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변희룡)
아시아와 조선에서의 대가뭄과 기근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에는 큰 기회였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이 1876년 조선과 강제로 맺은 강화도조약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기회를 줬다. 이 당시 조선은 1877년의 엘니뇨 때부터 인도나 중국처럼 가뭄으로 큰 타격을 받았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1877년 11월 조선에 일본으로부터 쌀을 받도록 권유했다.
“지난해 가뭄으로 상황이 가혹했고, 올해도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조선관리)
“우리는 쌀이 많으므로 조선이 우리 쌀을 받아줬으면 좋겠습니다.”(일본 공사)
“조선 반도는 땅이 너무 작아서 일본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보답으로 쌀을 되갚을 능력이 없습니다.”(조선관리)
“우리는 조선을 돕고자 하는 일이며 조선 쌀을 우리가 가져 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일본 공사)
그러나 일본 공사가 한 이 말은 채 10년도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이 큰 가뭄으로 시달리며 곡창지대였던 호남지방의 농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갔으니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전라도의 굶주린 농민들은 이 사태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자각과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당시, 삶에 대한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이 서양의 서학에 대항했고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됐다. 동학은 인내천사상으로 전통적인 신분제도의 철폐와 인간평등주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기근으로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도적이 들끓고 민심이 흉흉함에도 관리들은 오히려 토색질을 일삼았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통분한 농민들이 전봉준 동학 접주를 중심으로 고부군청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10개 고을에서 1만 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해 무장을 갖추면서 동학교도와 농민이 연합한 동학군을 결성했다.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패퇴시키고 5월 10일 정읍으로 진격했다. 전주에 입성한 동학군은 6월 11일 24개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관군과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이 동학농민전쟁에 끼어들면서 양상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어떻게 하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까 노리던 일본에 동학농민전쟁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 준 격’이었다. 조선 조정에서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6월 초 급히 군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6월 11일 전주 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이 종식되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은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에 일본의 군부는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계획을 추진한다. 전쟁계획을 진행시키는 와중에 한양으로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에 침입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 6월 23일에는 일본 수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대를 참패시킨 후 친일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이에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투쟁을 선언하고 다시 무장군을 일으켰으나, 10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주?우금치 싸움에서 일본군에 참패한 후 해산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고 사형에 처해진다. 당시 엘니뇨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대기근이 없었다면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했을까?
[TIP]동학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1895년 日함대, 청나라 해군력 무력화 요동반도 점령
일단 조선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은 청나라를 무력화해 조선을 확실하게 점령하고자 한다. 이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구실로 일본이 청나라에 제안했던 내용이다.
첫째, 서울~부산 간의 군용 전선가설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할 것. 둘째, 조선은 앞서 체결한 제물포 조약에 따라 일본 군대를 위한 병영을 건설할 것. 셋째, 아산에 있는 청국군은 정당한 명분 없이 파견된 것이므로 즉시 철퇴할 것. 넷째, 청한 수륙무역장정 등 조선의 독립에 저촉되는 청한 간의 모든 조약을 폐기할 것.
일본의 이 같은 제의에 대해 청나라가 단호히 거절하자 일본은 수순에 따라 외교관계를 단절한 다음 8월 1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청나라는 도저히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1895년 1월 30일 일본함대는 청나라의 해군력을 무력화시켰다. 일본 육군은 도망치기에 바쁜 청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요동반도를 점령했다. 이에 열강들의 중재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됐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극동지역의 최강자로 올라섰고, 청나라는 덩치만 큰 무력한 나라로, 조선은 일본의 강권적인 간섭에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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