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2_0020_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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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
광개토왕비는 집안시 교외 대비가(大碑街)에 있으며,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비는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리고 고구려 역대 왕릉을 안전하게 관리하게 위해, 왕이 서거한 2년 뒤인 414년에 그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
비는 화강암 받침돌 위에 높이 6.39m, 무게 약 40톤의 불규칙한 사각기둥의 모양을 하고 있다. 석질은 응회암으로 원래 자연석 상태에서 약간의 가공을 하였을 뿐이다. 비문은 각 면마다 먼저 사각형의 구획선을 정하고 세로로 계선(界線)을 친 다음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매 행의 최대 글자 수는 41자로 모두 약 1,775자의 글자들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처음부터 제1면 6행까지로 고구려의 기원 전설 및 왕조 초기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을 기술하였다. 둘째 단락은 7행부터 제3면 8행 15자까지로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주변지역에 대한 정벌 활동 등 훈적에 관한 기사이다. 세 번째 단락은 그 다음부터 끝까지로 왕릉의 수묘(守墓)를 위한 수묘인 숫자와 그 출신지 및 관련 법령을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비는 그 내용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 규모 면에서도 단연 세계 금석사상의 으뜸이다. 지금은 비록 비각과 유리방호벽으로 둘러 싸여 있지만 그 웅장한 자태를 보노라면, 고구려인의 기상이 그대로 전해온다. 울퉁불퉁한 그야말로 자연석 돌기둥에 금방 새긴 듯 아직도 그 필획이 선명한 1, 800자에 가까운 글자들에 담긴 이야기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며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왕의 무용담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왕비의 2면
광개토왕비의 2면
1928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 비각
이전의 목재비각을 철거하고 1982년에 세운 콘크리트비각
태왕릉에서 바라본 광개토왕비와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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