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6_0010_0030
Ⅲ. 안학궁의 위치와 환경
고구려 안학궁 조사 보고서 2006
오강원
안학궁은 서벽까지를 기준으로 할 때 평양시 중심으로부터 직선 거리로 동북쪽 8.7km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안학궁은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 속하여 있는데, 대성구역은 1958년 구 평양시 서구역의 대성리, 청암동, 미산동, 와산동, 룡북동, 룡남동, 룡흥동, 흥부동, 전승동과 북구역의 삼신동, 안학동, 고산동, 림흥리의 11개 동 2개 리를 합쳐 처음으로 신설되었고, 1959~1990년까지 약간의 변동이 있다가, 현재는 룡남동, 룡흥 1동, 룡흥 2동, 룡흥 3동, 룡북동, 미산 1동, 미산 2동, 미암동, 청암동, 대성동, 고산동, 림흥동, 청호동, 안학동, 갑문동의 15개 동으로 편제되어 있다. 1958년 이전 안학동은 대한제국기에는 평양부 림원면 북사동, 1914년에는 대동군 림원면 북사리, 1946년에는 평양시 북구 북사리, 1952년에는 평양시 북구역 남북사리, 1955년에는 북구역 안학동에 속하여 있었다. [주039]
안학궁은 대성산 소문봉(해발 239.5m) 남사면 끝(해발 50m 선)에 근접하여 있는데, 실제로는 소문봉으로부터 대동강을 향해 뻗어 나온 대지성의 완만한 잔구(해발 35~45m 선)와 잔구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저지에 위치하고 있다.
즉, 남북 종축선 상에 배치되어 있는 중심 건축군은 대성산으로부터 뻗어 나온 대지성 완만 잔구에, 남중문은 완만 잔구로부터 한 단 떨어진 완사면지에(해발 30m 선), 동벽과 서벽은 중심 건축군이 들어서 있는 잔구와 안학궁 버스 종점으로부터 김치 공장에 이르는 잔구(안학동) 및 천문대가 시설되어 있는 잔구(구 당산동) 사이의 저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안학궁은 지체 구조 상평남저산지와 평양평야의 과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안학궁 일대의 지질 구조는 북한 측의 최신 조사 자료가 공개되어 있지 않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림 1] 안학궁 일대의 지형(축척 1 : 50,000) [주040]
그러나 20세기 전반 이후 이 일대에 대한 지질 조사에 근거하여 볼 때, [주401] 이 일대는 안학궁 북쪽의 대성산 등과 함께 평안계에 속한다. 평안계는 후기 고생대의 중기와 후기인 석탄기와 페름기 및 중생대 전기인 트라이아스기를 포함하는 지층으로서 평양누층군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안학궁 일대의 암상학적 지질 구조는 대체로 가장 하부에 전기 고생대의 전기(캄브리아기)와 중기(오르도비스기)에 형성된 대석회암통이, 그 위에 석탄기의 홍점통, 그 위에 페름기의 고방산통, 그 위에 트라이아스기의 녹암통, 그 위에 백악기와 신생대의 지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석탄기 홍점통은 자색·녹회색·조립사암, 사질셰일, 석회암, 역암 등으로, 페름기의 고방산통은 백색 조립사암과 회색·흑색·갈색 세일과 석회암 등으로, 트라이아스기의 녹암통은 홍색·황녹색·암회색 셰일과 얇게 협재되어 있는 사암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안학궁성이 자리하고 있는 대성산성 남록과 대동강 북안 일대의 신생대 지층은 기본적으로 평양평야(낙랑준평원)와 같은 지질 및 토양상에 속한다. 평양평야는 백악기의 석회암을 중심으로 하는 해성퇴적층(해저 석회암+해양 점토)이 오랜 세월 동안 물에 의해 용식되어 형성된 석회암 지형의 종말기 지형이다. 다시 말해 평양평야 어디에나 석회암이 용식되어 남겨지게 된 붉은 점토(테라로사)가 두텁게 덮혀 있기 마련인데, [주042] 이러한 토양상은 안학궁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043]
[사진 1] 안학궁의 토양 (남중문 동벽 안측과 건물 터 사이)
이와 같은 지질 구조를 보이는 안학궁은 고대 교통로 상에서도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즉, 예나 지금이나 평양 일대의 중심 교통로는, 대동강 북면만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안주로부터 순안을 거쳐 평양 중심으로 이어지는 남북 노선과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하류의 남포와 대동강 상류의 성천 또는 대동강 중상류 남안의 강동이 연결되는 동서 노선이다. 그런데 안학궁은 대동강 중상류역에서 평양에 이르는 동서 노선이 궁 앞 지근 거리로 지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주—평양의 남북주 노선에 버금가는 주요한 남북 노선인 개천—순천—평성—평양 선이 역시 안학궁과 지근 거리에 있는 합장강 연안을 따라 지나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외 안학궁 남쪽 대동강 가는 고구려 시대 이후 근세까지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주요한 도진과 목교가 시설되어 있었다. [주044]
[그림 2] 『대동여지도』 상의 대성산과 교통로
한편 안학궁을 복판에 두고 정북쪽에 대성산성이, 남쪽 2.5km와 3.25km에 각각 청호동 토성과 대동강이, 동쪽 3.5km에 장수천이, 동남쪽 2km에 고방산성이, 서쪽 3.5km에 합장강과 청암동 토성이 에둘러 싸듯 위치하고 있어 안학궁을 방어하는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대성산 남쪽과 대동강 북안에는 평양평야의 일부이자 대동강의 잦은 범람에 의해 형성된 비옥한 충적 대지가 형성되어 있어 농업 생산물을 조달하는데에도 어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들판과 잔구(대동강 침수역인 해발 8m 이하 지점 제외)가 발달하여 있어 안학궁을 중심으로 도성이 형성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까지 갖추고 있다.
[그림 3] 안학궁과 주변 주요 유적의 위치도
[사진 2] 식물원 구역 9호 벽화무덤
[사진 3] 안학동 무덤떼가 있던 자리
[사진 4] 안학궁에서 바라 본 고방산성 원경
실제로 안학궁 일대에는 도성과 관련된 유적이 적지 않게 분포하고 있다. 즉, 안학궁 동북쪽 3.3km 처의 삼석구역 노산동으로부터 서북쪽 1km 처의 대성구역 식물원에 이르기까지의 해발 10~50m 등고선 상에 기단식 적석묘와 벽화분을 포함한 봉토석실분이 대규모의 무덤떼를 형성하고 있고, [주045] 서쪽 600m 처의 해발 10m 등고선 상에 고구려 기와 편과 함께 도로 유구가, 남쪽 0.8~1km 처의 잔구 상에 역시 고구려 기와편과 함께 생활 유적이 밀집 분포되어 있다. [주046]
또한 서남쪽 1.75km 처에는 상오리 절터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안학궁은 자연지리는 물론 고고학적 환경 면에서도 왕성으로서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주
주 039 방린봉 외, 2001, 「대성구역」, 『조선지명편람(평양시)』(사회과학출판사).
주 040 朝鮮總督府, 1942(測量), 「平壤」, 『五萬分之一地形圖』(陸地測量部)(景仁文化社影印本).
주 041 矢部長亮, 1919, 「朝鮮平安南道無煙炭層地質調査文」, 『朝鮮地質調査要報』I ; 中村新太郞, 1936, 「平壤炭田の地質構造について」, 『地質學雜誌』43 ; 孫致武, 1965, 「平安系의 層序에 관하여」, 『文理大學報』12—1 ; 鄭昌熙, 1986, 『地質學槪論』(博英社).
주 042 平安南道誌編纂委員會 編, 1978, 「大同郡」, 『平安南道誌』.
주 043 안학궁의 구지표가 테라로사(terra rossa)임에 대해서는 이번의 남북 공동 조사 기간 동안 보고자가 직접 확인한 바 있다.
주 044 1918년의 오만분의 일 지형도(朝鮮總督府, 1918, 「平壤東部」, 『五萬分之一地形圖』(陸地測量部))에 의하면, 고구려 목교지가 발견된 지점에 청호리(강북)와 휴암동(강남)을 잇는 美林津이, 그 서쪽에 고방산(강북)과 秋乙美面북부(강남)를 잇는 龍下津이, 그 동쪽에 상오리(강북)와 衣岩里를 잇는 衣岩渡가 표기되어 있다. 고구려 목교지(안병찬, 1982, 「새로 발굴한 고구려의 나무다리」, 『력사과학』3기)는 청호동의 대동강안에서 발견되었다.
주 045 關野貞, 1917, 「高句麗時代墳墓」, 『大井五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總督府) ; 關野貞, 1941, 「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墳墓及繪畵」, 『朝鮮の建築と藝術』(岩波書店) ;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관한 연구」, 『유적발굴보고』9(사회과학원출판사) ; 김사봉·최응선, 1988, 「안학동, 로산동 일대의 고구려무덤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4기.
주 046 한인호·리 호, 1991, 「안학궁터부근의 고구려리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4기, 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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