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6_0010_0020_0020 
* 한자음과 일본명만 추가했습니다.


2. 기존의 연구 성과

고구려 안학궁 조사 보고서 2006 > 안학궁의 역사적 배경과 기존의 연구 성과

이인철

 

안학궁에 대해서는 일찍이 關野貞(세키노 다다시/관야정)이 안학궁에서 출토되는 와당은 고구려 늦은 시기의 것이고 청암동토성에서는 고식의 와당이 출토된다는 사실을 들어 고구려 평양성을 대성산성으로 보고 그와 짝을 이루는 평지성을 청암동 토성이라 주장하고, [주001] 안학궁은 唐草瓦(당초와)가 발견된 사실을 들어 고구려 말기의 별궁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주002] 이에 대해 1931년에 이병도가 고구려 평양성을 대성산성으로, 궁궐을 안학궁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였고, [주003] 1949년에는 황욱이 산성과 궁성과의 관계에서 방향이 문제가 아니라 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 하면서 발굴해보지도 않고 안학궁지에서 나온 몇 개의 기와 편만을 가지고 고구려 말기의 것이라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주004]


채희국도 1964년에 안학궁 발굴 조사의 성과를 종합 정리하면서, 안학궁지의 연대 문제를 논하였다. 그에 따르면 안학궁지의 축조 연대를 논증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로는 기와의 막새 문양이 있는데, 안학궁지의 기와 막새는 수키와 막새 10종, 암키와 막새 3종인데 고구려의 암키와 막새가 발견된 곳은 안학궁 뿐이라 한다. 대성산성에서 출토된 기와가 사질이 섞인 점토제 붉은 기와인데 비해 안학궁지에서 출토된 것은 색깔이 청회색이며 태토가 백토에 가깝고 문양의 구도는 더 정교하다고 한다. 안학궁지에서 나온 청회색 토기가 장군총과 태왕릉에서 다수 발견되고 수키와 막새 문양 중의 적지않은 부분이 같으며, 후기의 문양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점을 들어, 안학궁이 4세기말 내지 5세기 초에 축조가 시작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주005] 채희국은 안학궁의 형태가 약수리 벽화 무덤의 성곽도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청회색 기와가 사용된 것은 왕궁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안학궁’이라는 말도 ‘아낙’에서 온 것으로 ‘내궁’을 의미하며 내궁은 곧 왕궁이라 하였다. [주006] 나아가 국내성 내에서도 청회색 기와가 보이는 점을 들어 청회색 기와는 왕궁 또는 왕궁의 무덤 등과 같이 왕과 직접 관련된 건축물에만 사용하였던 것이 명백하므로 안학궁지의 청회색 기와는 거기가 바로 왕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였다. [주007] 이처럼 안학궁이 평양 천도 직후에 사용한 왕궁이라면, 장안성은 안학궁에서 다시 옮겨간 고구려 후기의 도성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1951년에 三品彰英(미시나 쇼에이/삼품창영)이 평양성(장안성)을 고구려성이 아닌 것처럼 말한 것에 대해, [주008] 1957년과 1965년에 채희국이 평양 성벽에서 발견된 ‘刻字城石’(각자성석) 등을 근거로 삼품창영(三品彰英/미시나 쇼에이)을 비판하고 장안성이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평양성이라 하였다. [주009] 1966년에 정찬영은 각자성석을 근거로 채희국이 569년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 견해를 비판하고, 장안성으로 천도한 586년보다 7년이나 늦은 593년에 장안성이 완공되었다고 하였다. [주010] 그리고 최희림이 1967년에 장안성에 대해 최종적으로 북측의 견해를 종합 정리한 글을 내놓게 된다. [주011]


1973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안학궁을 포함한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보고서가 『대성산의 고구려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발굴 보고서는 10여차에 걸쳐 궁지의 유적을 모두 드러내었다고 적고 있다. 안학궁지 발굴 사업을 통하여 안학궁 토성의 구조를 밝히고 토성벽을 복구할 수 있는 자료를 얻었으며 6개의 성문 자리와 해자 및 수구문과 못 자리도 발굴하여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는 자료를 얻었다고 한다. 또 토성 안에서 총건평 31,458m2되는 52채의 집자리들과 이들 집자리들에 있는 2,590개의 기둥 자리를 찾아내었다고 한다. [주012] 보고서는 성벽, 성문, 해자, 궁전터(남궁, 중궁, 북궁, 동궁, 서궁), 유물(기와, 도기), 유리 장식품, 구슬, 철제품, 정원 터 등의 순으로 안학궁을 사진, 도면과 함께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013] 이 가운데 성벽은 이번의 남북 공동 조사에서 다시금 명확하게 확인된 바와 같이 아래 부분을 계단식으로 들여쌓기 하였음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안학궁이 전형적인 고구려식 축성법에 의해 축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주014] 고구려 무덤 부분에서 안학궁 아래층에서 발굴된 3개의 고분을 소개하고 있다. [주015] 이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 북측은 427년에 천도한 평양성이 대성산성이고 왕궁은 안학궁이었던 것으로 입장을 최종 정리하였다. [주016]


일본에서는 1973년 발간된 『대성산의 고구려유적』이 입수되면서 안학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안학궁을 전기 평양성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되었다. 田村晃一(고이치 타무라/전촌황일)이 대성산성 출토의 수막새 문양이 전체적으로 청암동 토성의 수막새 문양과 공통성이 많은 반면에, 안학궁에서 출토된 와당들이 대성산성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관야정과 마찬가지로 청암동 토성을 대성산성과 한 세트를 이루던 장수왕 대의 왕성이라 주장한 것이다. [주017]


千田剛道(지다 다케미치/천전강도)도 암막새는 안학궁을 제외하고는 집안이나 평양 지방에서도 출토된 바 없고, 한국에서 암막새가 성행한 것은 통일신라 및 발해 시기이기 때문에 암막새는 7세기 말 내지 8세기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수막새도 안학궁에서 출토된 것 중에는 주연에 연주문을 가진 것이 많고, 중방이 원형을 이루지 않고 4엽의 화판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은 통일신라의 와당과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안학궁의 궁전 배치도 8세기의 발해 상경성과 기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안학궁의 창건은 후기 평양성 시대, 즉 7세기 후반 이상 올라가기 어렵다고 하였다. [주018]


이런 가운데 안학궁을 발굴한 전제헌이 1985년에 안학궁 유적 발굴 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종합분석한데 기초하여 안학궁 유적, 유물의 유형과 특징, 안학궁 유적의 성격과 연대, 안학궁 유적의 역사적 위치, 안학궁 유적의 복원 등의 문제점들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유물 및 문헌 자료들을 가지고 해명하려고 노력한 글을 발표하였다. [주019] 전제헌은 안학궁이 왕궁이라는 점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 중에 주목되는 것을 보면, 안학궁은 역대 궁성의 평균 규모와 근사하고, 칸 수에서 발해궁전과 같고 만월대나 경복궁의 궁전보다 크다고 하였다. [주020] 이는 안학궁이 고려 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면 평양에 만월대보다 큰 건축물로 조영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반론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글에서 전제헌은 안학궁이 3세기 초에 건설되었으며 4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의 수도성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고 하였다. [주021]


한국에서도 閔德植(민덕식)에 의해 안학궁에 대한 분석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주022] 민덕식은 안학궁성의 축성 시기와 축조 공법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안학궁을 고구려의 중기도성으로 보았다. 와당의 문양에 대해서도 안학궁이 후기 평양성으로 천도한 후에도 별궁으로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초창기 때부터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건물의 기와에 대한 改瓦(개와)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주022] 즉, 기존의 논의와 같이 안학궁 기와들의 편년이 고구려 말이라고 한다면, 고구려 말에 대대적인 보수와 개와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주023] 장안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안학궁을 별궁 등으로 계속 사용하였다면 고구려 말 혹은 그 이후의 와당이 나온다고 해서 안학궁의 축조 시기를 와당 편년을 따라 고구려 말 이후로 내려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장안성으로 천도하기 전인 평원왕 13년(571)에 궁실을 중수한 기록이 전하는데 이 때 개와를 했다면 안학궁은 새 기와로 단장함과 동시에 낡은 기와들은 모두 다른 장소로 옮겨져 폐기되었을 것이다. 이는 현재 발견되는 기와만을 가지고 안학궁의 축조시기를 단정지울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도 하다.


이와는 달리 일본 학계에서는 이미 안학궁 출토 기와에 대한 편년을 아예 고구려 시기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주024] 이 주장은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關口廣次(관구광차/세키구치 히로지)가 주연에 장식된 연주문과 암막새의 출토를 근거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가진 고려 와당이라고 주장하면서 점차 부각되었다. [주026] 고구려 말로 보던 千田剛道(지다 다케미치/천전강도)역시 최근에 입장을 바꾸어 고려시대의 기와로 보고 있다. [주027] 한국에서도 일부 기와 연구자에 의해 안학궁 출토 와당이 고려 시대, 그 중에서도 12~13세기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주028]


이처럼 안학궁에서 출토 혹은 수집된 것으로 공개된 기와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안학궁 기와의 편년은 학자에 따라 각각 4~5세기설(채희국, 전제헌), 7세기설(관야정, 천전강도, 전촌황일, 민덕식), 10세기설(영도휘신신, 천전강도), 그리고 12~13세기(박은경)로 크게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안학궁의 축조 연대도 획정하기 어렵다.

기와의 편년을 고려 시기로 보는 설은 그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이들 기와가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한 극히 지역색이 강한 와당문이기 때문이라 하면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주209] 하지만 이는 안학궁 출토 청회색기와가 고구려 궁성용으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보다 정황 근거에 있어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주030]


1991년에는 한인호와 이호가 청호동과 임흥동, 안학궁 서쪽 지대에서 도시 구획 흔적이 알려졌고, 안학궁 남문 터와 대동강의 고구려 나무다리 터 사이의 대지에서 비교적 규모있게 드러났다고 하고, 이 도로 구획은 안학궁 도읍 시기에 안학궁을 중심으로 하여 고구려의 도시 구획이 자리 잡고 있던 유적지이며 고구려 때의 리방 구획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특히 안학궁성 남문 터와 대동강의 나무다리 터를 연결하면 당시의 ‘궁남로’또는 ‘주작대로’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031] 1998년에도 한인호는 평양의 도시 면모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것은 주민 거주 구획의 분포라고 하면서, 그 분포 범위는 안학궁성의 남쪽 지대로부터 동쪽으로는 고방산성 서쪽의 30m 등고선 지대까지이고, 서쪽으로는 합장강 동쪽 기슭까지이며 남쪽으로는 대동강 기슭까지를 포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점은 고방산 서쪽 기슭에서부터 청호동 토성 부근을 포함한 800~1,000m에 이르는 곳이고 그 다음은 대동강, 합장강, 고산천에 의하여 둘러싸인 지대의 중심부와 안학궁의 서쪽과 남쪽의 구릉 지대라 하였다. 이를 토대로 한인호는 안학궁 도읍 시기 고구려 평양의 웅장한 도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주032] 이러한 연구는 안학궁이 왕궁이고 고려 시대에는 평양에 왕궁이 없었으므로, 안학궁이 고려 시대의 궁성일 수 없다는 또 다른 반론이기도 하다.


전제헌이 작성한 도면에 의하면, 안학궁 터 지표로부터 65~70㎝ 정도 내려가면, 석실분의 저부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033] 이는 유구의 상반부를 파괴하고 궁전이 조영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므로 그 전후 관계가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석실분을 전제헌은 2세기 말 3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주034] 田中俊明(다나카 도시아키/전중준명)은 전제헌의 보고서에 안학궁의 궁전 유구로부터 지하로 120㎝정도 들어가면, 석실분의 저부가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하면서, [주035] 일본 학계의 고구려 횡혈식 석실의 편년 연구를 바탕으로 안학궁 내의 고분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등장하는 형식이라고 보고, [주036] 이는 안학궁이 427년 천도 시의 왕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고구려 시대의 유구도 아님을 시사한다고 하였다. 즉, 대성산성이라고 하는 왕도의 중심에 해당하는 성의 기슭에 조성된 고분군이라면 비록 왕릉이 아니라 해도 왕권에 가까운 세력의 고분군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궁전 유구가 그것을 파괴하고 조영되었다는 것은 같은 왕권이 계속되었던 고구려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한다고 하였다. [주037] 그러나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고, 무덤칸이 조잡하게 만들어진 사정을 감안하면 안학궁 내의 고분이 왕권과 가까운 세력의 무덤일지는 좀 더 검토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장수왕 대의 강력한 왕권이 그 이전에 조성된 평양 지역 귀족 세력의 무덤을 파괴하고 왕궁을 건설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양정석은 안학궁 남궁의 배치 구조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비교사적 검토를 통해, 안학궁에는 수당 대 이후 동아시아 도성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즉, 안학궁은 수당 대에는 폐기되었던 동서당제가 채용된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의 궁궐 배치도가 활용되었다고 하면서 명확한 근거없이 수당의 궁궐 배치를 기본형으로 하여 안학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경계하였다. [주038]


이상과 같이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와 연구 동향을 통해서 볼 때, 안학궁지의 고분 축조 시기, 안학궁 궁전 유구와 고분의 층위 관계, 안학궁 출토 와당의 편년, 궁성의 형태와 정확한 도면, 성벽의 축조 방식과 축조 시기에 대한 정밀 조사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본 재단에서는 이번에 김일성종합대학 및 사회과학원과 함께 안학궁성의 주요 구간 및 지점에 대한 지표 및 측량 조사와 함께 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주 001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39 —1 ; ______, 1941, 『朝鮮の建築と藝術』(岩波書店), 353쪽.


주 002 關野貞, 1941, 위의 책, 364쪽.

주 003 李丙燾, 1931, 「平壤の在城及び羅城」, 『靑丘學叢』3, 123~124쪽.

주 004 황욱, 1949, 「고구려고도(평양성잡고)」, 『문화유물』1. 채희국도 황욱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관야정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평양 성벽에서 나온 ‘刻字石’등을 방증 자료로 하여 장안성이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평양성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채희국, 1957, 「평양부근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유적」, 『문화유산』57 —5, 9쪽).


주 005 채희국, 1964,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유적에 관한 연구』, 56~60쪽.

주 006 채희국, 1964, 위의 책, 76~77쪽.

주 007 채희국, 1964, 위의 책, 79쪽.

주 008 三品彰英, 1951, 「高句麗王都考」, 『朝鮮學報』1, 15~54쪽.

주 009 채희국, 1957, 앞의 글, 9쪽 ; 채희국, 1965, 「평양성(장안성)의 축성과정에 대하여」, 『고고민속』3기, 20~27쪽.


주 010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2기, 13~15쪽.

주 011 최희림, 1967, 「평양성을 쌓은 년대와 규모」, 『고고민속』2기, 27~35쪽 ; _____, 1967,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성벽축조형식과 시설물의 배치상태」, 『고고민속』3기, 20~28쪽.


주 012 김일성종합대학 고고 및 민속학 강좌, 1973, 앞의 책, 105쪽.

주 013 김일성종합대학 고고 및 민속학 강좌, 1973, 앞의 책, 104~264쪽.

주 014 김일성종합대학 고고 및 민속학 강좌, 1973, 앞의 책, 106~112쪽.

주 015 김일성종합대학 고고 및 민속학 강좌, 1973, 앞의 책, 275~283쪽. 이들 고분의 위치에 대해 보고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안학궁 터를 발굴한 전제헌의 설명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학궁 터 1호분을 이번에 다시 조사한 결과, 보고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무덤의 윗부분이 현재의 지표 상태에서 60cm 정도 아래에 무덤 바닥이 있었고 무덤간의 벽은 안학궁 축조 당시 잘려나가서 벽의 높이가 28cm 정도 남아 있어서 주변 건물지의 주춧돌과 그 아래 기초시설이 무덤 벽과 옆으로 같은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주 016 김일성종합대학 고고 및 민속학 강좌, 1973,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99~100쪽.

주 017 田村晃一, 1988, 「高句麗の城郭について」, 『百濟硏究』19 ; _____, 2001, 『樂浪と高句麗の考古學』(同成社), 236~238쪽 ; _____, 1976, 「高句麗の山城」, 『考古學ジヤ一ナル』121, 252~253쪽.

주 018 千田剛道, 1983, 「淸岩里廢寺と安鶴宮」, 『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創立30周年記念 文化財論叢』(東朋社出版), 1031~1034쪽.


주 019 전제헌, 1985, 앞의 글, 3~130쪽.

주 020 전제헌, 1985, 앞의 글, 86~87쪽.

주 021 전제헌, 1985, 앞의 글, 97쪽.

주 022 閔德植, 1989, 「高句麗의 中期都城」, 『韓國史論』19.

주 023 閔德植, 2003, 「高句麗平壤城의 都市形態와 設計」, 『高句麗硏究』15, 123~124쪽.

주 024 閔德植, 2003, 앞의 글, 123쪽.

주 025 永島暉臣愼, 1981, 「高句麗の都城と建築」, 『難波宮址の硏究』7(論考篇)(大阪市文化財協會).

주 026 關口廣次, 1987, 「瓦當文樣雜考—高句麗の瓦當文樣を中心として」, 『考古學ジャ—ナル』285.

주 027 千田剛道, 1996, 「高句麗·高麗の瓦」, 『朝鮮の古瓦を考える』(帝塚山考古學硏究所), 22~23쪽.

주 028 朴銀卿, 1988, 「高麗瓦當文樣의 編年硏究」, 『考古歷史學志』4, 107~164쪽.

주 029 千田剛道, 1996, 앞의 글, 22~23쪽.

주 030 채희국, 1964, 앞의 글, 56~58쪽.

주 031 한인호·리 호, 1991, 「안학궁터부근의 고구려리방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81, 29~33쪽.

주 032 한인호, 1998, 「안학궁부근의 고구려 수도 도시 면모에 대한 복원」, 『조선고고연구』107, 17~20쪽.

주 033 전제헌, 1985, 앞의 글, 93쪽.

주 034 전제헌, 1985, 앞의 글, 95쪽.

주 035 전제헌의 논문에 그러한 오해를 살만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안학궁 1호분을 실제 발굴해본 바에 의하면 무덤 바닥은 지표에서 60~70cm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보고서에도 그렇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田中俊明의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


주 036 東潮, 1997, 「高句麗における橫穴式石室墳の出現と展開」, 『高句麗考古學硏究』(吉川弘文館), 142쪽.

주 037 田中俊明, 2004, 「高句麗の平壤遷都」, 『朝鮮學報』190, 45쪽.

주 038 양정석, 2005, 「安鶴宮 南宮 正殿廊의 構造를 통해본 高句麗 都城制」, 『고구려의 국제관계』(고구려연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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