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321150302330
고구려의 동계와 책성
[고구려사 명장면 67]
임기환 입력 2019.03.21. 15:03
고구려의 동쪽 경계에 대해서는 '위서(魏書)'에 고구려의 영역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435년 장수왕대에 고구려를 방문했던 북위(北魏) 사신 이오(李傲)가 전하는 말이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제법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5세기 초 고구려의 동쪽 경계였던 책성은 언제부터 고구려의 영역이 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책성이 일찍부터 등장하고 있다. 태조대왕(太祖大王)은 서기 98년(재위 46년) 봄 3월에 책성으로 순수하고 10월에 돌아왔는데, 이때 태조왕은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책성 관리들에게 하사품을 내리고, 또 바위에 공적을 새겼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02년에도 책성에 사신을 보내 백성을 위무하였다.
당시 국왕의 순수는 일종의 영역 관리라는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였다. 특히 태조왕이 책성에 거의 8개월가량 장기간 머물고 있음을 보면 이 지역을 매우 중시했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 바위에 공적을 새겼다는 점도 거의 유일한 기록이기에 눈길을 끈다. 그 공적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태조왕이 책성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공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당시 순수가 상당히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 행위였다는 추정도 해봄 직하다.
그리고 산상왕 때인 217년에는 한(漢)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000여 가(家)를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하자 이들을 책성에 안치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대규모 중국 출신 집단을 먼 변경의 책성에 이주시킨 것은 이 지역의 농경 개발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고구려 초기부터 중시했던 책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태조왕 때 책성 기록만으로는 그 위치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책성은 '위서'에 고구려의 동쪽 경계로 전해지고 있고, 고구려 말기까지 최고위 지방관이 파견된 곳으로 여러 금석문에 책성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또 발해시대에는 동경(東京)이 용원부 혹은 책성부라는 기록도 있다. 즉 책성이란 지명이 발해까지도 이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후대의 책성에 대한 기록을 통해 책성의 위치를 추적하면, 두만강 하류 지금의 중국 훈춘(琿瑃)시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훈춘시에는 고구려 시대에 축성된 대규모 성곽으로서 평지성인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이 있고, 산성으로는 살기성(薩其城)이 남아 있다. 이 두 성의 하나를 책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 도성 등이 산성과 평지성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식으로 만들어졌음을 고려하면, 굳이 어느 하나를 책성이라고 한정하기보다는 두 성을 하나의 책성으로 파악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온특혁부성)이 치소성으로 사용되다가, 위급 시에 산성(살기성)이 활용되는 상황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책성이란 이름이 독특하다, '책(柵)'이란 이름에서 본격적인 성벽을 구축하기 이전에 등장하는 목책 등이 연상된다. 어쩌면 처음 이 지역을 장악한 태조왕 무렵에는 목책을 축조하였기에 여기서 책성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고구려의 책성으로 비정되는 온특혁부성: 온특혁부성은 금나라 때의 이름이다. 이 성의 북쪽에는 요, 금 때의 성곽인 비우성(裵優城)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붙어 있다.
책성이란 이름의 연원과 관련해서는 북옥저(北沃沮)의 다른 이름인 치구루(置構婁)와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다. 구루(溝婁)는 곧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말로서, 치구루는 곧 치성(置城)이다. 치성은 책성과 음이 서로 통한다. 즉 책성은 북옥저 중심 성곽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북옥저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족 집단이었음을 고려하면, 책성의 위치와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북옥저는 아직 그 실체가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이 일대에 대한 고고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걸쳐 두만강, 목단강(牧丹江), 수분하(綬芬河) 유역에 단결문화(團結文化)라는 독자적인 문화권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를 북옥저문화로 보기도 한다. 즉 두만강 하류 일대에는 일찍부터 독자적인 문화 기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책성이나 북옥저는 언제부터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을까?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왕이 재위 10년(서기전 28년)에 북옥저를 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연대를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이른 시기에 고구려가 북옥저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조왕이 책성 순수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했다고 생각된다.
또 245년 조위(曹魏) 유주자사 관구검이 침공할 때 패퇴한 동천왕이 동옥저를 거쳐 북옥저로 피난하였다. 이때 위나라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북옥저까지 추격하여 북옥저에 대한 정보가 중국 역사서 '삼국지'에 남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북옥저가 위치한 두만강 일대는 함흥 평야 일대의 동옥저와 더불어 고구려의 배후기지 역할을 하였다. 책성은 바로 북옥저가 위치한 두만강 하류 일대를 고구려가 장악한 뒤에 이 지역을 통솔하기 위해서 설치한 변경의 전진 기지이며, 지방통치의 거점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책성 말고 또 '신성(新城)'이라고 불리는 동북 대진(大鎭), 즉 군사 거점이 있었다. 서천왕이 276년(재위 7년) 4월에서 8월동안 장기간 순수했던 곳이다. 293년(봉상왕 재위 2년)에 전연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해 오자 봉상왕은 신성으로 피란갔는데 왕을 마중나온 신성재 고노자가 추격해오는 전연군을 격퇴한 바 있다. 이렇게 서천왕의 장기간 순수 및 봉상왕의 피난 사례를 보면 앞서 본 책성의 이미지가 겹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신성을 책성과 동일한 곳으로 보기도 하지만 '新城', 즉 "새로 축조한 성"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성과는 다른 곳으로 보는 게 타당하겠다. 필자는 신성을 중국 연길(延吉) 일대로 본다. 즉 연길에 위치한 고구려 성곽인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흥안고성(興安古城) 등을 신성에 비정한다.
지금도 두만강 권역은 크게 훈춘시 권역, 연길시 권역 등 2권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바로 고구려 시대에 책성과 신성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바로 그 권역 그대로이다. 이 두만강 권역은 광개토왕비문에도 등장한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 연호의 차출지역 중 매구여(賣句余), 동해고(東海賈), 돈성(敦城) 등이다. 돈성은 곧 신성이며, 책성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매구여가 치구루와 통하기 때문에 책성에 해당한다. 동해고는 글자 그대로 두만강 하류에서 동해안 일대 어디일 것이다.
그 뒤 고구려 후기에 책성에는 도독(都督), 즉 욕살(褥薩)이라는 가장 높은 지방관이 파견되었던 동북지역 통치의 중심지였다. 근래에 발견된 고구려인 묘지명 자료에서 단편적인 모습이나마 전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기에 당에 항복한 인물인 고자(高慈)의 묘지명을 보면 할아버지 고량(高量)이 '3품 책성도독'을 지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당에 투항한 이타인(李他仁)의 묘지명에는 그가 고구려 멸망 직전에 '책주도독 겸 총병마(柵州都督兼總兵馬)'를 역임하면서 12주(州) 지방과 37부 말갈(靺鞨)을 관장했다고 전한다.
이타인 묘지의 간단한 기록이지만 고구려가 책성과 그 권역을 어떻게 통치하였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말갈에 대해 살펴볼 때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책성은 고구려 시기 내내 동북방 두만강 권역의 중심지였다. 고구려의 동쪽 경계는 어차피 동해와 맞닿는 곳이니 어디까지가 경계인가를 따질 게 아니라, 어느 지역이 중심지였고 어떻게 운영되었나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책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두만강 권역이 갖는 남다른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고구려의 영역 중에서 서쪽 요동이나 북쪽 부여 땅은 4세기 말 5세기 이후에 고구려의 영역이 된 곳이다. 고구려의 후기 수도였던 평양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도 4세기 이후에 고구려 땅이 되었다. 한강 유역은 광개토왕, 장수왕을 거치면서 비로소 고구려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러고 보면 두만강 일대만이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권역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고구려 영역을 구성한 곳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구려 멸망 후 다른 지역은 신라의 변경으로, 당의 변경으로 버려진 곳이었지만, 두만강 권역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등장하여 한때 수도가 자리 잡고 발해 번영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도 이 두만강 권역과 책성은 고구려의 자취를 가장 오랫동안, 짙게 담아온 곳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두만강 권역은 북옥저로부터 시작하여 말갈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인이면서도 고구려인이 아닌 집단이 내내 자리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건국의 주요 기반을 마련한 발해 사회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측면이다. 고구려의 영역 중에서도 두만강 권역이 갖는 독특한 모습이 고구려 문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음을 짐작케 한다.
오늘 우리에게 두만강 권역이라고 한다면 북한 외에 중국 연길과 조선족 사회부터 떠올릴 것이며, 그리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게 된다. 여기에 조선 세종 때의 6진을 상기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는 더 역사를 소급해 가는 게 그리 쉽지 않다. 그만큼 이 지역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서도 변방 취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다르다. 두만강 권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남해안까지 내려오는 루트는 신석기 시대 이래 역사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던 문화 루트이며 주민들의 이동 길이었다.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길이며, 그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충돌이 빈번하게 벌어진 길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교역이 이루어진 길이며, 고려시대에는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의 축조가 이루어진 길이다.
오늘날 남북분단으로 길이 끊어지면서, 두만강 권역과 그 땅에 대한 인식도 끊어졌다. 길이 끊기면 우리의 시선도 차단되는 법이다. 그래서 남북으로 철도를 잇고 두만강 너머로 길을 열어야 하는 데에는 역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한 '시선의 복원'이라는 충분하면서도 당위적인 이유가 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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