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amu.wiki/w/%EC%8B%A0%EC%84%B1#s-5 (나무위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5_0050_0020_0010_0020 (우리역사넷 1)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5_0050_0020_0010_0020 (우리역사넷 2)
https://news.v.daum.net/v/20190321150302330 (매경)
(동북) 신성
하나로 자세히 설명된 내용이 없어서 여기저기 토막난 내용을 모았습니다.
5. 고구려의 성 新城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B%A0%EC%84%B1#s-5
고구려의 성(城) 중 하나. 신성은 3군데 이상이 있었다. 첫번째는 고구려 동북 동해안 지역에 있던 성이 있었고, 하나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원왕 5년조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고 한 그것은 현재의 요녕성 혼하(渾河) 북안의 고이산산성(高爾山山城)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국원왕 대에 동북쪽 신성을 신축하면서 서북 지역의 신성은 이와 구별하여 돈성(敦城)으로 불리었다.[1] 또 하나는 내몽골 츠펑시 인근의 신성으로 거란과 해족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거란신성이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원정하면서 거쳐갔으며 고구려 말기까지 당나라와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다.
(중략)
신성의 역대 태수 중에서는 고노자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주)
* 주) 고노자는 동북 신성의 재(관직)였고 서북 신성의 태수이기도 했다. 아래 우리역사넷 내용 참조
(1) 고구려 초기의 지방통치제 - 우리역사넷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5_0050_0020_0010_0010
태조왕대의 柵城(책성) 순수와 서천왕대의 新城(신성) 순수는 북옥저를 비롯한 두만강 유역에 대한 통치권의 확인이며, 태조왕의 南海(남해) 순수는 동옥저에 대한 지배권의 확인이었다
(2) 고구려 「성·곡―촌」제의 성립 - 우리역사넷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5_0050_0020_0010_0020
한편 공납적 지배를 하던 속민집단에 대해서도 3세기말부터는 점차 각 읍락을 城·谷(성-곡)으로 편제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려 직접적인 영역지배를 도모하였다. 봉상왕대에 동북 新城(신성)의 宰(재)와 서북 신성의 太守(태수)를 역임한 북부 출신 高奴子(고노자)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559) 고노자가 파견된 동북 신성은 북옥저 지역이고, 서북 신성은 양맥을 지나 서북부 최변경의 요충지로서, 양지역 모두 과거에 속민지배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중략)
지방관은 성과 곡 단위에 파견되었다. 이 시기의 지방관으로는≪삼국사기≫에 宰와 太守·守(대수,수)가 보이나,566) 이러한 중국식 지방관명이 그대로 사용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다만 봉상왕대의 고노자가 小兄(소형)으로서 동북의 新城宰(신성재)를 역임하고 다시 승진하여 大兄(대형)으로서 서북의 新城太守(신성태수)를 역임하는 것을 보면, 재와 태수 사이에는 지방통치 조직상의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567)
(중략)
수사 아래의 지방관명은 사료에 나오지 않으나, 신성재 고노자의 예에서 대개 소형급이 역임하였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후기의 婁肖(누초)에 해당된다.
[고구려사 명장면 67] 고구려의 동계와 책성 - 매경
https://news.v.daum.net/v/20190321150302330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책성 말고 또 '신성(新城)'이라고 불리는 동북 대진(大鎭), 즉 군사 거점이 있었다. 서천왕이 276년(재위 7년) 4월에서 8월동안 장기간 순수했던 곳이다. 293년(봉상왕 재위 2년)에 전연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해 오자 봉상왕은 신성으로 피란갔는데 왕을 마중나온 신성재 고노자가 추격해오는 전연군을 격퇴한 바 있다. 이렇게 서천왕의 장기간 순수 및 봉상왕의 피난 사례를 보면 앞서 본 책성의 이미지가 겹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신성을 책성과 동일한 곳으로 보기도 하지만 '新城', 즉 "새로 축조한 성"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성과는 다른 곳으로 보는 게 타당하겠다. 필자는 신성을 중국 연길(延吉) 일대로 본다. 즉 연길에 위치한 고구려 성곽인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흥안고성(興安古城) 등을 신성에 비정한다.
지금도 두만강 권역은 크게 훈춘시 권역, 연길시 권역 등 2권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바로 고구려 시대에 책성과 신성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바로 그 권역 그대로이다. 이 두만강 권역은 광개토왕비문에도 등장한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 연호의 차출지역 중 매구여(賣句余), 동해고(東海賈), 돈성(敦城) 등이다. 돈성은 곧 신성이며, 책성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매구여가 치구루와 통하기 때문에 책성에 해당한다. 동해고는 글자 그대로 두만강 하류에서 동해안 일대 어디일 것이다.
고이 산성 - 세계한민족문화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11818&localCode=krcn
『삼국사기』서천왕(西川王) 7년[276년]의 분주 기사에 신성이 나라의 동북쪽에 위치한 큰 진영[국지동북대진야(國之東北大鎭也)]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신성은 고구려의 서북쪽이 아니라 동북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 임기환은 지명 및 역사적 상황 등을 근거로 해당 시기의 신성은 고구려의 동북 지역 즉 책성이 위치한 두만강(豆滿江) 즉, 연길(延吉)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한편,『삼국사기』에는 335년에 고구려 북쪽 지역에 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진서(晉書)』와 같은 중국 문헌에도 신성은 337년이나 339년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요동 지역 신성의 축조는 3세기 중반이 아니라 4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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