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90929
전두환의 '스크린-섹스-스포츠', 용서 못할 또하나의 잘못
[언론개혁 4] 지역 방송 억압하는 구조 고착화
19.12.04 14:14 l 최종 업데이트 19.12.04 14:14 l 김종성(qqqkim2000)
▲ 진주 KBS 방송국. ⓒ 윤성효
"지방방송 좀 꺼라"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따금 농담처럼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농담처럼 할 뿐, 결코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언로를 독점하려는 누군가의 의도에서 나오는 말이다.
농담 같지만 결코 농담이 아닌 그 말은 한국 방송의 구조적 모순을 담고 있다. '지방방송 좀 꺼라'는 국가권력 혹은 수도권의 요구를 담은 한마디라고 할 수 있다.
돈과 기업과 권력만 수도권에 편중된 게 아니다. 텔레비전 방송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수도권 중심으로 편제된 TV 방송은 서울의 가치관을 전파하는 기능은 해도 지방의 가치관을 전파하는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TV 방송을 시청하다 보면 서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어도, 지방 사람들 특히 제주·강원·충북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서울 사람들이 원하는 '지방 소식'
물론 지방에도 TV 방송국들이 있다. 지방에도 KBS와 MBC가 있고, 민영방송국들이 있다. 하지만, 지방 TV가 전국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미미하다. 지방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방 TV의 영향력이 미미하다면 수도권 TV라도 지방의 목소리를 잘 전달해줘야 하건만, 그렇지도 못하다. 저녁 6시부터 한 시간 정도는 수도권 TV에서 지방 소식을 접할 수 있지만(예컨대, KBS1 <6시 내고향>), 그 시간대에 나오는 지방 소식은 상당 부분 서울시민의 관점에 입각해 있다. 지방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갖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들을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
그 시간대에 수도권 TV에서 주로 접하는 것은 지방의 먹을거리나 볼거리들이다. 그런 정보들도 물론 유익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정보들마저 서울시민 관점으로 제공되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서울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 만한 음식, 서울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힐링을 느낄 만한 관광지가 주로 소개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2005년 8월 <언론과학연구> 제5권 제2호에 실린 문종대·이강형의 논문 '내부 식민지로서의 지역방송 재생산에 관한 연구'는 "현행 방송구조 하에서 지역 정서를 반영하는 지역 생활, 문화, 여론 등이 전국적으로 방영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제한되어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한 바 있다.
수도권 TV에서 지방 소식이 비중 있게 보도되는 것은 주로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경우다. 장마나 태풍, 지진 등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릴 정도가 돼야 수도권 TV가 지방을 비춰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보도들도 상당부분은 중앙정부의 관점을 담고 있다.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영향이나 국가적 손실을 가늠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이 TV 화면에 비칠 때가 많다. 해마다 지방 사람들만 자연재해 피해에 노출되도록 방치하는 구조적 모순에 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만약 지역적 편향 없이 자연재해를 보도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면, 폭우·태풍·지진 등으로 인해 피해가 속출할 당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지방 소식이 지속적으로 보도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2017년 포항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2년째 흥해실내체육관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고 있지만, 서울 지역 TV에서는 이런 뉴스가 어쩌다 한번 보도될 뿐이다.
만약 서울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해 잠실실내체육관 같은 데서 시민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한다면, 상황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이에 관한 뉴스가 TV에 나올지 모른다. 재해구제에 나서는 중앙정부의 태도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목포MBC의 경우
▲ 세월호 3주기 특집 보도를 3일간 이어갔던 목포 MBC ⓒ 목포MBC
그렇다면 지역방송이 자기 지역 관점을 담아 독자적인 방송을 해보면 어떨까? 이 점은 중앙 MBC와 지방 MBC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앙 MBC는 지방 MBC 지분을 51%에서 100%까지 소유하고 있다.
2017년 <언론과학연구> 제17권 제2호에 실린 이승선·김재영 교수의 논문 'MBC 지배구조를 위한 법적 제안의 특성과 과제'는 "역사적으로 MBC는 직할국이 소수에 불과했으나 지역의 독립방송국을 제휴사로 흡수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고 한 뒤 "MBC는 계열사 체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 채 지역 MBC 사장 자리를 본사의 인사적체 해소용으로 전락시키고, 나아가 지역 계열사에 대한 통제 고리로 활용하면서 내부 식민지화했다"고 말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본사인 서울 MBC가 전원 구조 오보를 낸 데 반해, 목포 MBC는 이것이 오보임을 인지해서 선내에 사람들이 있다는 보고를 본사에 네 번이나 했다. 하지만 목포 MBC의 보고는 서울 MBC에 의해 묵살됐고, 세월호 관련 보도를 충실하게 하던 기자가 인사상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 물론 당시는 박근혜 정부 시절로, 보도공정성 논란을 일으킨 바 있는 안광한 사장 때이긴 했다.
박영훈 목포 MBC 기자는 2017년 9월 오마이뉴스 기사 '세월호 참사 당일 목포 MBC의 좌절... 본사 정말 이상했다'에서 "나는 세월호 취재 기간, 아직도 정확히 그 의중을 모르는 어떤 타의로 보도부를 떠났다가(2014년 7월) 얼마 전 다시 돌아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진선 목포 MBC 기자도 목포 MBC가 올려보낸 세월호 관련 보고를 서울 MBC가 왜곡해서 방송했다고 증언한다.
"목포 팽목항이나 사고 해상에서 2주기, 3주기 같은 행사가 있으면 우리가 촬영해서 서울로 보내는데, 유가족 인터뷰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으면 (서울에서) 바꾸라고 요구해요. 그냥 슬퍼하면서 '아이들 보고 싶다'는 내용만 나가서, 목포에서 나간 인터뷰와 서울에서 나간 인터뷰가 다른 경우도 있었어요." (기사 <"세월호 기사 통째로 사라져" 목포 기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 중
이런 문제는 KBS나 MBC뿐 아니라 서울 지역 민방인 SBS와 전국 지역민방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전두환의 방송 정책, 지방 주민들 억눌러
▲ 제주 MBC 4.3 다큐멘터리 "회춘" ⓒ 제주MBC
이렇게 TV 방송이 중앙집권화 사슬에 얽매이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박정희 정권에 책임이 있다. 박정희 정권이 방송을 정권의 이념 선전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민영방송을 확대하는 정책을 펴면서도, 정권의 이념을 지방에 전파해줄 수 있는 쪽에 허가를 내준 박 정권이 조장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한국언론학보> 제57권 제2호에 실린 유현옥·김세은의 논문 '제3공화국 시기 지역 미디어의 확산과 지역권력의 형성'은 박정희 정권의 방송정책과 관련해 "KBS-TV를 개시하고 3대 민방을 허가했으며,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지역 민방의 대폭적 허가가 이루어졌다"면서 "정치권력자들의 연고지에 민방을 허가함으로써 관료적 계도성과 선전매체적 특성이 한국 방송의 정체성으로 내재화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축된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전두환 정권의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한층 더 견고해졌다. 정권의 이념을 지방에 파급시키는 데 기여하는 방송 시스템이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한층 더 공고해진 것이다. 한국의 방송 시스템은 이로 인해 정권이나 수도권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전파할 뿐, 지방 문화와 가치를 여타 지방이나 수도권으로 전파하는 기능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됐다.
만약 전국 각지의 개성과 가치관을 골고루 반영하는 방송 시스템이 예전에 구축됐다면, 대한민국이 지금보다는 덜 수도권 위주로 짜였을 수도 있고,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의 한이 오래도록 사무치게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1948년 제주 4·3의 한이나 1980년 광주 5·18의 한이 너무도 뒤늦게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은 지역방송을 억눌러온 구조적 한계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례로, 제주 4·3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분석한 권귀숙 제주 4·3 전임연구원의 논문 '4·3의 대항 기억과 영상'(<제주도 연구> 제24집)에 따르면, 제주 MBC와 제주 KBS에서 4·3에 관한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다뤄진 것은 6월항쟁 이후인 1989년부터다. 그에 비해 수도권 TV가 4·3을 다룬 것은 1999년이 처음이다.
이 논문은 1989년부터 2003년까지 공중파 TV에서 130편 이상의 4·3 다큐가 방영됐지만, "TV 다큐멘터리는 거의 제주 지역 방송, 특히 제주 MBC에 의해 제작되었고, 주 시청자도 제주 주민"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가치관은 전달해도 지방의 가치관은 전달하지 못하는 방송 시스템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흔히 전두환 시대의 우민화 정책을 스크린, 섹스, 스포츠의 알파벳 앞 글자를 따서 3S 정책이라고 한다. 이 정책을 관철시키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 바로 방송이다. 전두환의 지역방송 장악은 그의 3S 정책을 위해서 복무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역방송을 살리고 독립시키는 것은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그간의 민주화 투쟁이 시민권력 대 국가권력의 관점에서 전개됐다면, 지방권력 대 국가권력의 관점에서 또 다른 민주화투쟁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지역방송 살리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방송 독립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케 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가만히 둔다고 해서 그런 과제가 저절로 성취되지는 않다. 지금은 박정희·전두환 때처럼 정권이 지역방송을 억압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지역방송을 혁신적으로 지원하는 노력이 국가 정책으로서 강구돼야 하는 이유다.
태풍·장마·지진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서울 이외의 지역 소식이 항상 TV 화면을 채울 수 있도록 하려면, 그래서 TV만 봐도 지방 사람들의 처지와 생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지역 방송에 대한 중앙의 장악력을 약화시키는 법적·제도적 개혁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방송 꺼라'라는 요구 대신, '지방방송 볼륨 좀 키워 달라'는 요구가 나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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