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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해설난중일기 34] “흐렸다(陰)” 한문 한 글자 일기

일요서울 입력 2016-02-22 14:12 승인 2016.02.22 14:12 호수 1138 48면


- 일기 기록이 남긴 ‘명장’· ‘경영자’ 이순신

- 썩지 않고 남는 세 가지(三不朽)…立德·立功·立言


<난중일기, 아산현충사 소장>


한 사람의 삶이 영원히 남는 방법이 있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밤을 새워 즐겨 읽었던 중국 괴기소설 《전등신화》에는 그 방법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선비 하안(夏顔)은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책을 남기지 못하고 그만 객사했다. 죽어서도 자신의 삶을 영원히 남기고 싶었던 하안은 귀신이 되어 친구를 찾아가 말했다. 그는 《춘추좌전》에 나오는 “사람이 죽어서도 영원히 썩지 않고 남는 세 가지(三不朽)”, 즉 “최고는 덕을 쌓는 것(立德), 그 다음은 공로를 세우는 것(立功), 마지막으로는 말을 남기는 것(立言)”을 언급하며 자신이 남긴 글을 책으로 출판해 줄 것을 부탁했다.


기록 중독증


이순신에게 《난중일기》와 그의 보고서 모음집인 《임진장초》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하지 않아도 확실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역사 속 인물처럼 그저그런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의 일기와 보고서에는 인간 이순신, 명장 이순신, 경영자 이순신의 모습이 낱낱이 들어있다.


그의 일기에서 그의 하루하루는 물론 잠재의식까지 나타난다. 7년 동안 일기를 썼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쓴 것은 아니다. 1593년 5월 1일 일기 앞에 메모된 내용은 그가 일기를 어떤 자세로 대했는지 가장 잘 보여준다.


▲ 기록할 생각이 있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아주 바빴고, 또한 휴식도 할 수 없어 잊고 손 놓은 지 오래 되었다. 이제부터 이어간다.


이순신은 전쟁과 굶주림, 전염병으로 고생했다. 또 모든 일에 정신없이 바빴다. 이 때 이순신은 <정축(丁丑)>이라는 간지(干支)만 쓴 1593년 3월 22일 일기 이후, 다시 붓을 들어 일기를 쓴 5월 1일 이전까지 37일 동안 위의 메모처럼 일기조차 쓸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위의 메모는 이순신이 한동안 놓아두었던 일기장을 들고 다시 쓸 각오를 다진 기록이다. 번역문의 “기록할 생각이 있었으나”의 한문 원문은 ‘의어필연(意於筆硯)’이다. 직역으로는 “붓과 벼루에 뜻을 두다”이다.


뒷날에 앞전 일기를 다시 쓰다


일기에 대한 이순신의 집착 모습은 다른 일기에도 나타난다. 조응록(1538~1623)이 남긴 《죽계일기(竹溪日記)》에 따르면,  의금부 도사 이결은 선조의 이순신 체포·압송 명령을 받고 1597년 2월 7일 서울을 출발했다. 2월 26일,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체포·압송되어, 3월 4일 서울 의금부 옥(獄)에 갇혔다. 사형을 눈앞에 두었지만, 판중추부사 정탁의 구명 상소와 이순신의 조방장·종사관으로 있었던 정경달 등 많은 사람들 노력으로 4월 1일, 28일 동안의 옥 생활을 끝내고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선조가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려고 했던 죄목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주고 토벌하지 않아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로를 빼앗고 모함한 죄(欺罔朝廷 無君之罪 縱賊不討 負國之罪 奪人之功 陷人於罪)”였다. 선조는 그 죄목을 들어 “법으로는 용서할 수 없으니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하인 자가 임금을 속였으니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할 정도로 단호했었다.


이순신에 대한 임금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쟁을 대비했고,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그의 존재가 조선을 살렸는데도 그는 어느 순간 나라를 버리고, 임금을 무시한 대역죄인이었다. 그 상황에서 백의종군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도중에 잠시 들린 고향 아산에서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극을 맞았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머니를 시신으로 맞았다. 나라의 죄인 이순신은 백의종군 명령을 따라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그가 아산에 잠시 들렀을 때, 여수에 피난하셨던 어머니가 배를 타고 아산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고, 어머니를 마중나갔다. 그러나 그가 만난 어머니는 살아계신 어머니가 아니었다. 다음은 그 날 일기이다.


▲ 1597년 4월 13일. 맑았다. 일찍 식사를 한 뒤, 마중하러 나가 해정길에 올랐다. 길 입구의 홍 찰방 집에 들렀다. 잠시 이야기하는 사이에, 아들 울이 애수를 보냈을 때는,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또한 “황천상이 술단지를 들고 흥백의 집에 왔다”고 했다. 홍 찰방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에 도착했다. 얼마 후에 사내종 순화가 배에서 왔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고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했다. 하늘의 해도 까맣게 변했다. 곧바로 게바위로 달려갔다. 배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갈 길이 바빠, 서러움에 찢어지는 아픔 마음을 다 쓸 수 없었다”라고 뒤에 대략 기록했다.


4월 13일의 일기 끝 부분, “뒤에 대략 기록했다(追錄草草)”는 것은 이순신이 그 날 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얼마 후에 그 날의 기억을 다시 살려 쓴 것을 뜻한다. 어머니의 부음에 충격을 받았고, 며칠 동안 장례 준비로 바빴기에 일기를 쓰지 못하다가 다시 붓을 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쓴 것이다.


이에 대해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이날부터 4월 19일까지를 후에 기록한 것이라고 표시했고, 소설가 이광수는 《소설 이순신》에서 “‘추록(追錄, 뒤에 적었다)’이라고 잔 글자로 적었다. 그날은 일기 쓸 경황이 없고 후일에 추측하였다는 말이다”라고 원문의 ‘추록(追錄)’을 부연했다.  이토록 열심히 일기를 쓴 이순신이었기 때문인지, 《난중일기》 한문 원문을 보면, 한 글자로 된 일기도 있다.


▲ 1592년 2월 18일. 陰(흐렸다).


현충사에 소장된 <친필 초서본>과 《이충무공전서》 속 일기, 박정희 대통령이 표제를 쓴 《재조번방지초》 속의 일기 전체에서 확인해보면, 한 글자 일기는 대부분 날씨만 기록한 경우로 총 35회 나타난다. 그 중 “晴((맑았다)” 30회, “陰(흐렸다)” 3회, “雨(비가 내렸다)” 1회, “雪(눈이 왔다)”가 그것이다. 이는 쓸 내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순신은 날씨 만이라도 기록해 일기를 빠짐없이 쓰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기는 한 사람의 역사기록이다.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기 원한다면, 이순신처럼 먼저 자신의 일기를 써야 한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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