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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36] 이순신과 기생(2)

일요서울 입력 2016-03-07 09:54 승인 2016.03.07 09:54 호수 1140 19면 


- 장군의 첩 ‘부안댁’ 규정은 근거 없어

- 조식과 동행한 한글 기생명 ‘강아지(江娥之)’


<미인도(신윤복), 간송미술문화재단>


1592년 2월 19일 일기의 기생 기록은 아주 간결하다. 처음 시찰을 떠나 시찰을 떠나 백야곶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순신을 마중 나온 순천부사가 기생을 데려왔고, 잠시 그들과 함께 봄꽃 구경을 했다. 그리고 다시 시찰을 떠난 것이 전부다. 이순신과 순천부사 일행등이 그곳에서 떠들썩하게 놀았던 모습이 아니다. 갈 길이 바빴던 이순신에게 잠시의 휴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난중일기>에는 2월 19일 외에도 이순신이 잠시 기생(?)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596년 9월 4일의 일추(一秋), 1596년 9월 11일의 세산월(歲山月)이 그들이다. 원문의 세산월(歲山月)을 ‘산월(山月)’ 혹은 ‘내산월(萊山月)’로 보는 번역본도 있다. 일추와 세산월은 일기의 정황과 이름, 기존 번역본을 따르면 기생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순신이 그들을 기생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추월과 세산월의 이름과 관련해 조선시대 기생의 작명 사례를 살펴보면, 오늘날 연예인들이 예명을 지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생들은 본이름 대신 별도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러나 지금의 연예인들의 예명과 달리 격이 높았다. 특정한 한시의 글자를 사용하거나 자연의 소재를 이용했다.


김준형의 《이매창 평전》에 따르면, 기생 옥계(玉桂)는 “옥(玉)도끼 둘러메고, 계수(桂樹)나무를 벤다 한들”라는 한시에서 ‘옥(玉)’과 ‘계(桂)’를 뽑아 합쳐 지은 이름이고, 추월(秋月)와 명월(明月)는 “중추팔월십오야(中秋八月十五夜)에 광명(光明)이 좋다 추월(秋月)이”, “일락서산(日落西山) 어두운 밤에 월출동령(月出東嶺) 명월(明月)이”에서 각각 나오는 추월(秋月)와 명월(明月)을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난중일기>의 세산월과 비슷한 이름의 기생들도 있었다. 허균이 만난 광주 기생 광산월(光山月), 유희춘이 만난 기생 동산월(東山月), 남명 조식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동행한 봉월(鳳月)이 그 경우이다. 조식과 동행했던 기생 중에는 한글 이름만으로는 웃음이 날 수 있는 강아지(江娥之)라는 이름도 있다.


일추와 세산월이 등장한 날의 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자원해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신 것이 아니다. 일추는 나주목사가 데려왔고, 세산월을 영광군수가 데려왔다. 이 시기는 이순신이 자신보다 상관이었던 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각 고을 순방하며 점검하고 전략전술을 짜던 때였다. 체찰사와 함께 혹은 별도로 매일 매일 장거리를 이동했다. 이순신은 순방지역 수령과 함께 소통하며 술자리를 가진 것뿐이다. 여자를 탐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 일기를 이순신의 상황을 배제하고 부분만 잘라 여색을 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일이다.


부안댁, 이순신의 첩인가?


기존의 많은 <난중일기> 번역본에는 ‘이순신의 첩(소실)’이 등장한다. 그러면 <난중일기> 원문에 ‘이순신의 첩’이라는 명시적 표현이 실제 나올까. 원문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이순신의 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많은 번역본에서 친절히(?) ‘○○○(이순신의 첩 혹은 소실)’이라고 번역문에 넣었을까. 그 ‘첩’이 들어간 일기를 보면, 번역자들이 번역 과정에서 ‘첩’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러면 그렇게 번역할 수 있었던 상상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번역자는 있을까. 없다. 필자가 살펴본 많은 번역서 그 어디에도 근거를 제시한 사례는 없다.


위와 같이 특정인물을 ‘이순신의 첩’으로 사족을 달아 번역한 일기 사례는 두 개이다. 1594년 8월 2일과 1594년 11월 13일 일기 속 인물들이다. 그 중 8월 2일 일기 속 인물은 거의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이순신의 첩’으로 번역하고 있다.


▲ 1594년 8월 2일.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람(扶安人)이 아들을 낳았다. 달 수를 계산했더니, 태어날 달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쫓아 보냈다.

▲ 1594년 11월 13일. 저녁에 윤련이 왔다. 그의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헛된 말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곧 남은 어린 세 자식이 끝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구나.


이 일기 중에서 이순신의 첩이라는 사족이 붙어 번역된 인물은 8월 2일의 ‘부안 사람’, 11월 13일의 ‘그의 누이’이다. 원문은 그저 ‘부안인(扶安人)’·‘기매(其妹)’일 뿐이다. ‘부안인’을 최초로 이순신의 첩으로 본 사람은 홍기문이다. 그는 부안사람에 대한 주석으로 “리순신 장군의 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가 부안 출생이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했다.


이은상도 주석으로 “부안 사람:공의 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부안 출생이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했다.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나머지 여러 번역본도 똑같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정일이 원문 그대로를 반영해 그저 “부안댁”으로 번역했다.


이순신의 족보에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이순신의 부인은 정실 부인 상주 방(方)씨와 이순신의 서자 훈(薰)을 낳은 해주 오(吳)씨 밖에 없다. 해주 오씨는 병마사 오수억(吳壽億)의 서녀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다른 서자녀인 신(藎)과 서녀 2명은 해주 오씨의 소생인지 불분명하다.


부안댁을 <난중일기>에서 살펴보면, 족보에 기록된 ‘오씨’가 아니라 ‘윤씨’ 일 가능성이 높다. 1594년 8월 2일의 부안댁, 같은 해 11월 13일의 윤련의 누이 편지, 그리고 1597년 10월 25일의 “윤련이 부안에서 왔다”는 세 일기 기록을 종합하면, 부안댁은 ‘윤씨’로 추정된다. 그 부안댁, 윤씨는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확증도 없이 부안댁 혹은 윤련의 누이를 ‘이순신의 첩’으로 규정하며 번역하는 것은 과잉 번역이다. 그들이 이순신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면, 원문 그대로 번역하고 사족을 달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을까.


1592년 2월 19일의 일기와 관련해 기존의 일부 번역서에는 또 하나의 오류가 있다. 여도권관(權管)이다. 권관은 변경지대의 작은 진영에 배치된 종9품의 무관이다. 이순신도 32살에 무과에 급제했을 때 처음 임명된 자리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었다. 2월 19일의 여도권관이 누구인지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러 번역본에서 ‘여도권관(황옥천)’이라고 황옥천이란 인물을 넣어 번역하고 있다. 황옥천은 전쟁 발발 후 탈영했다가 붙잡혀 효수된 여도 수군일 뿐이다. 장교급인 권관과는 그 급이 다르다.


<난중일기> 속 이순신의 여성(기생 등)과의 관계를 필자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순신과 한 세대 후의 무관들의 일기인 <부북일기>와 비교하면 된다. 고독한 리더, 참다운 리더 이순신의 진면목이 확연하게 보일 것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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