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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 해설 난중일기 53] 철두철미한 회계사

일요서울 입력 2016-07-11 08:37 승인 2016.07.11 08:37 호수 1158 49면 


- 난중일기 ‘회계장부이자 경영일기’

- 체포직전까지 군량미·화약 인수인계 철저


▲ <도둑의 발바닥을 치는 모습(스미소니언 박물관)>


경영자의 하루는 숫자로 시작해 숫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리와 혁신을 위한 바탕이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터 드러커는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객관적 숫자를 이용한 경영을 강조했다. ‘journal’이란 영어 단어가 있다. 대표적인 의미로는 흔히들 쓰는 신문(잡지)·학술지다.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기 혹은 일지라는 뜻도 있다. 회계학이나 상법 등에서는 분개장(分介帳) 혹은 일기장(日記帳)으로도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그 모두 거래 혹은 재산 변동 상황을 기록한 회계장부를 의미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라는 한 사람의 하루하루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보통의 일기장과 같다. 그러나 일기 곳곳에 들어 있는 각종 업무와 관계된 기록을 보면, 장수이며 경영자였던 이순신의 회계장부와 같은 모습도 나타난다. 때문에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경영일기라고도 할 수 있다.


▲ 1592년 3월 20일. 비가 크게 쏟아졌다. 늦게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각 방(房)이 물건 출납 현황을 보고했다(會計). 순천에서는 수색·토벌하는 일을 기한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대장(代將) 및 색리(色吏), 도훈도(都訓導) 등에게 이유를 추궁했다. 사도(蛇渡, 사도 첨사 김완) 또한 기한을 정해 모일 일을 공문으로 보냈는데도, “독자적으로 수색·토벌(搜討)하고, 게다가 반나절 만에 내나로도·외나로도와 대·소평두 수색·토벌하고 같은 날 포(浦)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 일은 심히 거짓된 것이다. 이 일을 자세히 따져서 살피기 위해 흥양 현감과 사도 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몸이 아주 불편해 일찍 들어왔다.


이날 일기의 첫머리는 이순신이 직할 근무지였던 전라좌수영 각 방(房, 부서)에게 회계(會計)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원문의 ‘회계(會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물건의 출납을 정리해 보고하는 것’을 뜻한다. 중앙행정조직은 매년 1·4·7·10월에, 지방행정조직은 연말에 임금에게 보고해야 했다. 이순신의 경우는 이 시기에 관할 좌수영의 각종 재물 상태를 확인한 듯하다. 《난중일기》에는 회계 관련 일기가 몇 번 더 나온다.


▲ 1594년 11월 25일. 흥양의 총통(銃筒) 제조 담당 색리 등이 이곳에 도착했다. 출납을 보고(會計)하고 돌아갔다.

▲ 1595년 3월 17일. 군량의 출납을 확인해(會計) 표(標)를 붙였다.

▲ 1596년 3월 14일. 군량 출납 보고(會計)를 마무리했다.


이 기록 중 1594년 11월의 총통 관련 회계를 제외하고, 1595년과 1596년은 군량과 관계된 회계 기록이다. 이로 보면, 1592년 3월 20일의 회계에는 군량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에게 회계 업무는 아주 중요했다. 관료들이 이·취임식을 할 때는 언제나 회계 상태를 기록한 해유문서(解由文書)를 인수인계했다. 관료들의 회계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관할 관청의 재물을 빼돌리는 탐장죄(貪贓罪)로 적발되면, 완전히 퇴출되었고, 심지어  자식의 관직 진출에도 제한이 가해질 정도였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각종 형태의 숫자들도 그가 평상시에 얼마나 진중 경영에 고심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회계에 철저한 이순신의 모습은 1597년 2월 한산도에서 체포되었을 때 드러난다. 조카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록》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은 가덕도 앞바다에 출전해 있었다.


체포 명령을 듣고 한산도로 돌아온 이순신은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군량미 9,914석과 화약 4,000근, 각 전선에 실린 총통은 물론이고 그 외의 총통 300자루를 인계했다. 전선에 출동했다가 갑작스럽게 체포, 압송되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인계하고 떠났다. 이는 그가 평상시 끊임없이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관리로서 책임과 의무를 잊지 않는 모습이다.


원균에게 인계한 군량과 화약의 수량을 보면, 전쟁 발발 이후 이순신이 얼마나 지독하게 일했는지도 알 수 있다. 전쟁 이후 이 시기까지의 일기를 보면, 군량과 화약 부족으로 고심한 흔적이 넘쳐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둔전을 개간했고, 소금을 구워 팔았고, 물고기를 잡아 팔아 군량을 마련했다. 또 전투의 승패와 직결된 화약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한편에서는 화약을 구성하는 한 원료인 염초를 이봉수로 하여금 아이디어를 짜내 생산케 했고, 자체 조달이 불가능한 석류황은 조정에 요청해 채웠다. 그 모든 것을 남겨두고 그는 서울 감옥으로 떠나야 했다.


3월 20일 일기 속의 용어인 ‘대장(代將)’은 ‘대리(代理)로 출전한 장수’를 뜻한다. 《난중일기》나 그의 보고서에 나오는 ‘대장(大將)’이나, ‘대장(隊長)’과는 다르다. 오종록의 《여말선초 지방군제 연구》에 따르면, ‘대장(大將)’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국가의 총사령관인 대장군(大將軍)의 약칭으로 사용되었고, 조선에서는 도절제사, 병마절도사를 대장(大將)이라고 했다.


‘대장(隊長)’은 해군본부 전사편찬관실에서 펴낸 《한국해양사》에 따르면, 군대 조직 단위의 하나인 1대(隊)의 장(長)으로 대정(隊正)이라고도 한다. 1대는 5오(伍), 총 25명으로 구성된다. 오(伍)는 군대 조직의 가장 하급 단위이다. 5명으로 구성되고, 책임자는 오장(伍長)이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보고서에도 당시의 각급 조직 단위가 언급되나, 규정과 달리 실제로는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모습이다.


도훈도(都訓導)는 《역주 경상좌병영 관련 문헌 집성》(성범중 외6인)에서는 “각 군영에 소속된 하급 군인 중 선임병”, 《호적》(손병규)에서는 “지방 향리로 군무를 담당하는 장(長)”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김성일의 <각 고을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함(傳令列邑將領等)>에 따르면, “10명의 군사 중 도망자가 있을 경우 통장(統將)을 참수하고, 통장 중 도망자가 있는 경우에 도훈도를 참수하라”는 내용이 있다. 그 어떤 경우든 군대 조직과 관련된 하급 간부급 직책이다.


수색·토벌로 번역한 원문의 ‘수토(搜討)’에 대해서도 번역본마다 차이가 있다. 설의식은 《난중일기초》에서 주석으로 “수토-병량(搜討-兵糧) 등 군수품을 검칙하는 일. 납입(納入)하는 일을 가리킴인데 일반적 의의로는 그 같은 처사 전반에 걸친 용어로 쓰인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홍기문은 《리순산장군전집》에서 주석으로 “한 지역을 전면적으로 수색하여 부정분자라고 인정되는 사람을 체포 내지 토벌하는 일”이라고 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홍기문의 주석이 타당한 듯하다.


색리(色吏)는 1592년 1월 16일, 2월 25일과 3월 6일에도 나왔다. 색리의 색(色)은 이두로는 ‘빗’으로 읽으며 직책의 뜻을 갖고 있다. 색리는 특정한 업무나 책임을 맡은 관아의 아전이다. 《난중일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순신에게 처벌받는 모습도 나온다. 한 사례로는 발바닥에 장치를 치게 하기도 했다(1594년 7월 21일). 《경국대전》에 따르면, 색리를 처벌하는 사유로는 고을 수령을 마음대로 조종해 권세를 휘두르면서 폐단을 만들거나, 뇌물을 몰래 받고 부역을 불평등하게 부과하거나, 세금 징수를 불성실하게 했거나, 백성의 생활을 침해하거나, 신역을 회피하거나, 양인의 딸이나 관청 여자 노비를 첩으로 삼는 경우 등이 있다. 《난중일기》 속 처벌 사유도 거의 일치한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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