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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55] 장군의 처벌(處罰)

일요서울 입력 2016-07-25 09:25 승인 2016.07.25 09:25 호수 1161 47면 댓글 0


<성과 해자(여수 진남관 전시실)>


- 실무 책임자를 처벌해 현장부터 다스리다!

- 장형(곤장)->옥살이->자자형(신체낙인刑)

 

이순신은 거의 대부분 새벽부터 바삐 움직였다.

 

▲ 1592년 3월 22일. 맑았다. 성(城) 북봉 아래에 물길을 파기 위해 우후와 군관 10명을 나누어 보냈다. 식사한 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북봉(北峯)은 여수시 군자동 종고산(220m)이다. 물길(水渠)은 2월 4일 일기에 나오는 해갱(垓坑)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해갱은 해자이다. 이순신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성을 새로 쌓고, 성 밖에 해자를 새로 팠던 듯하다. 해자와 관련된 다른 표현으로는 1월 11일의 호자(壕子), 3월 4일의 해갱(垓坑)도 있다. 이들의 위치는 서문 바깥이었다. 4월 19일에는 해자와 관련된 시설인 품방이 동문과 관련해 등장한다.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남문과 관련한 언급이 없다. 이는 남문에 기존의 해자가 있었고 수리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월 15일 일기에는 포갱(浦坑)이 나오는데, 포갱은 해자일 가능성도 있고, 그와 전혀 다른 시설인 선거(船渠, 뱃도랑. 선박의 건조나 수리 또는 짐을 싣고 부리기 위한 설비) 혹은 굴강일 수도 있다. 2월 27일 일기를 보면, 방답의 성과 해자가 부실한 것을 보고 이순신이 걱정을 하는 것을 보면, 관할 지역을 시찰할 때도, 성과 해자를 유심히 살폈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했고, 훗날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로를 세웠던 이시발이 저술한 <수성조약>에 따르면, 해자는 성벽에서 1장(丈, 약 3.3미터) 밖에, 약 9.9미터 깊이, 33미터 넓이로 파야 한다고 했다.


일기에서 ‘군관 10명’이라고 할 때 단위인 ‘명’은 원문에서는 ‘인(人)’으로 썼다. 반면에 2월 3일 일기에는 “탐라 사람이 자녀를 포함해 6명(口)”라는 표현이 나온다. ‘구(口)’라고 쓴 것은 ‘인(人)’과 달리 그들의 신분이 노비 혹은 천민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오희문도 《쇄미록》 1597년 3월 30일에서 자신의 노비 세 명을 ‘삼구(三口)’로 표현했다. 조선시대에 ‘구(口)’는 멧돼지?사슴?노루를 세는 단위이기도 했다. 그와 달리 소는 隻(척), 닭은 隻(척) 혹은 首(수)라고 기록했다.

 

이날 일기는 아침을 먹지도 않고, 성을 보수하고, 새로이 방비시설을 갖추기 위해 뛰는 모습이다. 뒤늦게 아침을 먹고, 다시 일터인 동헌에 나갔다.


▲ 1592년 3월 23일. 아침부터 흐렸다. 늦게 맑아졌다. 식사를 한 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보성에서 판자(板子)를 제때에 실어다 바치지 않았다. 색리를 찾아내 붙잡아 오게 공문을 다시 보냈다. 순천 부사가 소국진을 붙잡아 보냈다. 장(杖) 80에 처했다. 순찰사가 편지를 보냈다. “발포 권관은 군사를 이끌 인재로 적합하지 않으니, 처리하라”고 했다. 그래서 “잠시만이라도 해직시켜 교체하지 말고, 그대로 남겨 방어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답장을 써 보냈다.


업무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소국진(蘇國進)에게 장(杖)을 쳤다. 소국진은 1596년 3월 12일 일기에서는 소국진(蘇國秦)으로 ‘진’자가 다르게 나온다. 소국진이 등장하는 일기를 보면, 이순신 막하에서 이순신을 도왔던 영리로 보인다.


소국진이 맞은 장(杖) 80대는 어느 정도 처벌일까. 《난중일기》에는 여러 가지 형벌이 등장한다. 최악의 경우가 살인, 도둑, 강간범에게 했던 사형이다. 그 다음이 장(杖), 그 다음이 태(笞)이다. 장(杖)은 총 39회가 언급되고, 그 중 1회는 발바닥에 쳤다. 회수로 보면, 10대 1회, 20대 3회, 30대 4회, 40대 3회, 50대 3회, 60대 1회, 70대 2회, 80대 4회, 90대 2회, 100대 1회이다. 몇 대를 쳤는지 불분명한 경우는 15회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방에서 근무하는 장수는 장형 이하의 범죄자를 직결 처단할 수 있었다. 전시에는 이러한 한계도 없었다.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치는 태형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지를 저지른 사람에게 장형을 부과했다. 굴싸리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나 넓적다리를 때렸다. 최저 60대에서 최고 1백대까지 10대 단위로 5등급이 있다. 평상시의 군대에서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한 사람의 경우, 신분이 장수이면 60대, 군사는 90대를 때렸다. 장(杖)도 상황에 따라 그 위력이 아주 다르다. 장에 맞아 죽는 경우도 있고, 1597년 5월 27일 일기 내용처럼 불과 20대를 맞고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기도 했다.


흔히 ‘장(杖)’을 곤장(梱杖)이라고 하나, 장(杖)은 곤장(梱杖)과 다르다. 처벌 형태나 성격과 형식이 크게 다르고, 곤장은 조선 후기에 많이 등장한다. 《난중일기》에서도 ‘곤장(梱杖)’은 1598년 9월 23일 일기에 단 한번 나온다. 그것도 명나라 도독 진린이 우리나라 장수들에게 친 것으로 나온다. 이순신 시대에는 곤장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명나라의 처벌 형식이다.


태(笞)는 《난중일기》 1597년 6월 3일에 한 번 나온다. 몽둥이가 아니라 회초리와 비슷한 굵기의 막대로 때리는 것으로 횟수는 10대부터 50대까지 10대 단위로 5등급이 있다. 장이나 태를 세는 단위는 《난중일기》에서는 거의 대부분 ‘도(度)’로 쓰고 있으나, 한 번이지만 1598년 9월 23일 일기처럼 ‘개(介)’로 쓴 경우도 있다.


장형의 대상은 일반인부터 장수까지 다양했다. 이순신이 장을 치게 한 최고위급은 우후 이몽구였다. 수군 진영의 우후는 정4품이다. 그 외 나머지는 현장의 실무 책임자들이었던 색리들이 장을 많이 맞았다. 그런데 확실히 확인된 사례는 아니지만, 고위급 장수도 장을 맞은 경우가 있다. 1596년 3월 12일 일기에는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였던 원균이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장(杖) 40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김기환의  《이순신 세가》에 따르면, 도원수 권율이 부산 출병을 기피하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장(杖) 50대” 쳤다고 한다. 오희문 《쇄미록》 1594년 5월 5일에 따르면, 명나라 제독 유정이 우리나라 도원수 권율을 붙잡아다 장(杖)을 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장을 치는 신체부위는 대부분 엉덩이다. 그런데 간혹 발바닥이나 무릎을 치기도 했다. 《난중일기》에 언급된 발바닥이나 무릎에 치는 장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지나친 형벌이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순신의 경우는 1593년 7월 28일에 왜인의 옷을 입고 이상한 행동을 했던 포작들에게 발바닥에 장 10여 대를 치게 한 경우 외에는 없다. 무릎에 장을 친 사례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군량선에 탄 사람들을 친 경우가 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도망치다가 붙잡힌 남녀 노비의 발바닥을 대장(大杖)으로 친 장면이 나온다. 남자 노비는 7?80여 대, 여자 노비는 50여 대를 때렸다.


《난중일기》에는 한 차례이지만, 특별한 형벌도 등장한다. 도둑의 얼굴에 글씨 문신을 새기는 ‘자자형(刺字刑)’이다. 먹물로 글자를 새긴 곳을 봉하고 3일 동안 가둬두었다가 풀어주었다.


▲ 1594년 8월 29일. 도둑 3명 중에서 장손은 장(杖) 100에 처하고, 얼굴에 ‘도(盜, 도둑)’자를 새기게 했다.


이 자자형은 장(杖)이나 감옥에 가두는 벌보다 무거운 형벌이다. 대상은 부정한 관리나 도둑이다. 여자들의 범죄가 늘자 여자에게도 시행하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여자에게는 시행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형에 처하지 않는 강도에 대해서는 ‘강도(强盜)’라는 글자를 새기게 했다. 도둑이나 노름꾼의 배후 혹은 우두머리는 ‘강와(强窩)’를 새겼다. 도살 금지법을 3번 어긴 사람들 중에서 말을 도살한 사람은 ‘재마(宰馬)’, 소를 도살한 사람은 ‘재우(宰牛)’를 새겼다. 이 자자형은 영조에 의해 1740년에 폐지되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는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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