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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6] 기생과 장군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입력 2016-05-16 10:27 승인 2016.05.16 10:27 호수 1150 49면


삼짇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

 

▲ 제비집 속 제비


-조선시대 존재했던 석가탄신일

-기생·악기연주·춤, 흥 돋우는 데 필수


5월은 각종 기념행사가 넘쳐난다. 10월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기념일이 있다. 특히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것처럼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부부의 날이 있다. 또 어버이와 다름없는 스승을 기리는 날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현대의 일상을 반영한 근로자의 날, 유권자의 날, 발명의 날, 세계인의 날, 방재의 날, 바다의 날도 있다. 우리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5.18민주화운동기념일도 있다. 올해는 음력으로 인한 석가탄신일도 끼어 있다.


올해 기념일 중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경우는 석가탄신일이 유일하다. 《난중일기》에도 다양한 기념일이 나온다. 그들 중 대부분은 지금처럼 인위적인 기념일이 아니다. 국가의 의례와 관련된 왕과 왕비의 제삿날, 탄신일이 거의 대부분이다. 관습에 따른 석가탄신일도 물론 언급된다. 그러나 특징적인 장면은 전통명절 기록이다. 지금은 온갖 기념일 때문에, 혹은 사회경제 환경변화에 따라 잊혔지만, 다양한 세시풍속 기념일이 등장한다.  


▲ 1592년 3월 3일. 저녁까지 비가 계속 내렸다. 오늘이 명절이나, 이처럼 비가 내리니 답청(踏靑)을 할 수 없었다. 조이립과 우후, 군관 무리들과 동헌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술잔을 나눴다.


음력 3월 3일은 삼짇날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상사(上巳)·원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라고도 한다. 지난해 9월 9일에 따뜻한 남쪽으로 떠났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날이다. 《난중일기》의 기록처럼 답청하는 날이다. 답청은 한자의 뜻처럼, 술과 음식을 마련해 산과 들에 나가 꽃구경을 하고, 새로 난 풀을 밟으며 봄을 즐기는 풍속이다. 아이들은 버드나무 피리를 만들어 불고, 여자 아이들은 각시놀음을 한다.


어른들은 활터에서 활쏘기 대회를 하고 논다. 이 날의 주요 음식은 쑥떡·오색떡, 진달래꽃으로 만든 화전(花煎), 혹은 화면(花麵)을 먹는다. 1488년, 조선을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 동월은 삼짇날의 쑥떡을 조선의 고유한 풍속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1592년 외에도, 1593년과 1596년에 각각 답청절(踏靑節)과 명절(節日)로 삼짇날을 명시하고 있다.


▲ 1593년 3월 3일. 아침에 비가 왔다. 오늘은 곧 답청절이다. 그러나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에 떠 있었다.

▲ 1596년 3월 3일. 이날은 명절이다. 방답 첨사와 여도 만호, 녹도 만호와 남도포 만호 등을 불러 술과 떡을 권했다.


1594년은 삼짇날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낮에는 답청절 풍습 때문인지 부하장수들과 활을 쏘고, 저녁에는 일본군 전선의 출현 보고를 받고 출동했다. 1595년의 경우는 《이충무공전서》에만, 일기이기 때문인지 “맑았다”고 기록했다. 1597년은 2월 26일, 한산도에서 포박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때다.


이순신이 3월 4일 의금부 감옥에 갇혔으니, 서울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을 것이다. 1598년은 일기 기록이 없다. 기록이 있든 없든 몇몇 사례를 보면, 이순신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부하장수들과 삼짇날을 간소하게라도 즐겼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일기를 남긴 오희문은 1594년 3월 3일에는 전쟁과 흉년 등으로 굶주림이 극심했기에 삼짇날조차 굶고 있음을 한탄했고, 1597년 3월 3일에는 다행히도 관아에서 떡과 국수 등을 얻어 가족은 물론 아랫사람들과 함께 먹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혹독한 전쟁시기의 이순신과 조선 백성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의 답청절 모습은 간결해 그 날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무관 박취문이 함경도에서 근무할 때인 1645년 삼짇날의 일기에는 전시가 아닌 평시의 무관들의 삼짇날 모습이 보다 상세히 나온다. 이순신이 평시의 삼짇날에 부하장수들과 함께 어떻게 즐겼는지 상상할 수 있는 기록이다.


박취문은 부사가 활터에 차린 잔치에 참석했고, 활을 쏘고, 시를 지었다. 또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를 짓지 못했는데 박취문 만이 시를 지어 칭찬을 받았고, 노래도 잘 불러 부사에게 쌀과 콩, 술을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순신도 부하장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활터에 잔칫상을 마련하고, 한편으로는 함께 활을 쏘고, 다른 한편으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난중일기》에 명시된 조선시대 세시풍속 날은 설날·삼짇날·단오(5월 5일)·칠석(7월 7일)·추석·중양절(9월 9일)·동지이다. 1월 15일(정월 대보름), 4월 8일(초파일), 7월 15일(백중)은 명절 명칭을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크고 작은 잔치 혹은 행사를 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입춘과 경칩과 같은 절기를 명기하기도 했다.


지금은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외국의 기념일은 물론이고, 화이트데이·빼빼로데이 같은 기념일도 흔한 시대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통명절은 제대로 기념하지도, 또 현대에 맞는 문화컨텐츠로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고 있다. 컨텐츠가 경쟁력인 시대다. 이왕이면, 우리의 세시풍속을 재발견해 우리만의 경쟁력 있는 문화컨텐츠로 개발하면 안 될까.


기생이 빠진 이순신의 잔치


3월 3일, 이순신이 조이립과 술을 마신 이유는 4일 일기에 “아침에 조이립의 이별잔치를 했다(餞別)”고 한 것처럼 조이립이 다른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었다. 원문의 ‘전별(餞別)’은 이별할 때 잔치를 베풀거나 선물을 주면서 이별 인사를 나누는 의식이다.


조이립에 대한 《난중일기》 기록은 이 때의 기록을 포함해 1592년 2월 8일의 이순신의 외사촌 변존서와 활쏘기를 겨루는 모습, 2월 12일의 잔치에서 시를 읊는 모습, 2월 27일 이순신이 순시 중 경도에 도착했을 때 이순신의 동생 우신과 함께 술을 싣고 마중 나온 모습이 전부다. 변존서와 이우신이  함께했던 정황을 보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고, 충청도 아산과 관계있던 인물인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난중일기》에는 그 어떤 전별식에도 기생이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전쟁 전에 관할 지역을 순시할 때인 1592년 2월 19일 일기에 기생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이순신이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물론 이문건의 《묵재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박계숙·박취문 《부북일기》를 보면, 당시 양반들의 잔치에 당연한 구성원으로 기생이 등장한다. 모두들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기생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어 흥을 돋우는 필수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에서 이순신이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난중일기》에 기생과 즐기는 이순신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 까닭은 이순신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 영웅호걸의 하루하루가 아닌, 그저 삶의 원칙과 책임에 하루하루를 쏟아붓는 평범한 가장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스트레스에 짓눌린 삶. 그래서 그는 때때로 밤새 아파 끙끙거리고, 식은땀을 흘렸나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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