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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이야기 - 해설난중일기 35] 이순신과 기생(1)
홍준철 기자 입력 2016-02-29 09:38 승인 2016.02.29 09:38 호수 1139 48면 댓글 0
- 기생의 다른 말 방인(房人)과 소면(小眄)
- 일기 원문에 나오는 ‘탕화(蕩花)’의 오해
<신윤복, 월야밀회도, 간송미술문화재단>
탁상공론. 일을 망치는 첫 단추다. 역사 속 위대한 리더는 물론이고 현재의 탁월한 리더들은 언제나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 또 늘 현장을 찾아 듣고, 묻고, 상상하며 조직이나 사업의 위험을 감소시키고, 성공의 길을 고민했다.
현재 존재하는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이순신은 1월과 2월 중순까지는 직접 관할하는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무대로 책상과 좌수영의 각종 현장을 오가며 전쟁준비에 바빴다. 동헌 책상에서는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했고, 밖으로 나가면 군사를 점검했고, 방어시설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바닷가에 나가 쇠사슬 설치하는 것을 감독했고, 성벽을 보수하는 것, 해자를 파는 것, 봉수대를 쌓는 것을 낱낱이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였다. 그는 여수 좌수영 본영 뿐만 아니라 순천·광양·보성·흥양·낙안의 5관(官)과 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의 5포(浦)도 관할했다. 그 5관과 5포 역시 이순신이 직접 점검해야 할 곳이기도 했다.
▲ 1592년 2월 19일(양력 4월 1일). 맑았다. 여러 곳의 시찰을 시작했다. 백야곶(白也串)의 감목관(監牧官)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승평(昇平, 순천) 부사(권준)가 그의 동생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妓生)도 왔다. 비가 내린 뒤, 산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해 질 무렵 이목구미(梨木龜尾)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여도에 도착했다. 영주(瀛州, 흥양) 현감과 여도 권관(權管)이 나와서 맞이했다. 방어 준비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점검했다.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먼저 갔다.
이순신은 19일 좌수영을 떠나 첫 시찰지인 백야곶을 시작으로 이목구미·여도·흥양·녹도·발포·사량·사도·개이도·방답·경도를 거쳐 27일에야 좌수영으로 돌아온다. 그가 출발한 날짜는 양력으로는 4월 1일이다. 남녘에서는 봄이 완연한 날이다. 기나긴 겨울을 지나 꽃들이 활짝 핀 섬과 육지를 다니며 일기 기록처럼 봄날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이날 일기에는 ‘기생’이 등장한다. 7년 동안의 일기 중, ‘기생’이란 명칭 명시된 경우는 이날 일기가 유일하다. 물론 <난중일기>에는 다른 명칭의 기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 기생으로 ‘추정할 수도 있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다른 명칭의 기생은 방인(房人)과 소면(小眄)이다. 방인은 변방에 파견된 장수의 생활을 곁에서 직접 돕던 기생이다. 소면은 기생이지만, 방인과 다르다. 소면은 파견된 장수 혹은 지나가던 관리 등과 잠시 인연을 맺고 서로 좋아하는 수준이다.
많은 번역본에서 방인이나 소면을 ‘첩’으로 번역하지만, 조선시대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 보면 첩이라고 번역하기엔 한계가 있다. <난중일기>에서도 ‘첩’은 ‘소가(小家)’로 별도로 기록하고 있다. <난중일기>에 언급된 기생들인 방인·소면은 이순신과 관련된 인물이 아니다. 모두 그의 부하 장수 등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자신의 방인이나 소면, 심지어 첩조차 언급된 것이 없다.
전투 기간에 기생과 놀았다고?
1593년 2월 24일(양력 3월 26일) 일기 원문에 나오는 ‘탕화(蕩花)’ 현재 두 부류의 번역으로 나뉜다. 한 부류는 “노는 계집을 빼놓고서”“기녀들을 물러가게 하고”라고 번역했고, 다른 한 부류는 “꽃을 흩으며”“뱃놀이를 하면서”“배를 띄우고”라고 번역하고 있다. 두 부류의 번역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화(花)’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순신의 삶과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생물학적인 여자라는 의미가 담긴 번역에 동의할 수 없다.
1593년 2월 24일 일기 전후 상황을 보면, ‘화(花)’를 기생이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2월 17일, 이순신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했다. 18일, 웅천에 도착한 이순신과 그의 수군은 송도 주변에서 일본군 10여척과 전투를 했다.
19일에는 바람이 불어 어쩔 수 없이 사화랑에 머물렀고, 20일에 다시 출항해 일본군과 전투를 했다. 21일에는 바람이 불어 소진포에 머물다가 22일에 다시 웅천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23일까지 소진포에 머물렀다. 24일에는 칠천량으로 돌아와, ‘탕화(蕩花)’를 했다. 25일부터 27일까지는 바람이 많이 불어 칠천량에 머물렀고, 28일 다시 출동했다. 3월 6일, 이순신과 그의 수군은 웅천의 일본군을 다시 공격했고, 출동한 지 22일 만인 3월 8일에야 한산도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탕화(蕩花)’가 등장했다. ‘탕화(蕩花)’의 ‘화(花)’를 ‘기생(기녀)으로 보는 사람들처럼 번역한다면, 이순신 혹은 그의 부하의 배에 기생을 태웠다는 이야기다. 평상시도 아니고, 왕명을 받고 전투를 하러 간 이순신이 그의 전선 혹은 부하들의 전선에 기생을 싣고 다니게 했을까.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한 사례를 들면, 이순신은 1593년 5월 30일 일기에서, 남해현령 기효근이 배 안에 어린 아가씨를 태워놓고 사람들이 알까봐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우스운 일이라며, “국가가 이처럼 위급한 때에 미녀를 태워놓고 있다니, 그 마음 씀씀이가 제멋대로고 엉망이다”라고 탄식했다. 기효근은 경상우수사 원균 막하의 장수이다. 이순신의 지휘를 제대로 받지 않는 원균의 부하다. 이순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일기에 그렇게 탄식했다.
그런 이순신이 전투를 하러 갈 때 전선에 기생을 태워 출전하고, 전투 기간 중에 한가한 틈을 이용해 기생과 함께 놀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탕화(蕩花)’는 이 시기가 양력 3월 26일이라는 점에서, 또 바람의 영향으로 전투를 할 수 없는 상태인 점에서 볼 때, 섬에 올라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꽃구경을 했다’로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1592년 2월 19일, 이순신이 관할지역을 시찰할 때 섬에 꽃이 핀 풍경에 감탄한 모습과도 일치한다.
꽃구경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놀이이기도 했고, 봄날 꽃구경하는 모임도 있었다. 상화회(賞花會)가 그것이다. 이로 보면, 원문의 ‘탕화(蕩花)’는 상화(賞花)의 오자일 수도 있다. 이순신은 그 아름다운 봄날에 전쟁터 한복판에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고, 자신과 부하들의 삶과 죽음이 달려 있었다. 진달래가 만발한 아름다운 산 대신, 우뚝 서서 핏발 선 눈으로 일본군을 응시했다. 기생과 함께 논 것이 아니라, 포와 활과 칼과 함께 말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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