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0047_1_0014029&isEQ=true&kristalSearchArea=Phttp://db.history.go.kr/url.jsp?ID=tc
http://ko.wikipedia.org/wiki/%ED%83%9C%EC%A1%B0%EB%8C%80%EC%99%95


태조왕(太祖王) 

고구려 제6대 왕. 국조왕(國祖王)태조대왕(太祖大王). 유리왕의 아들인 재사(再思)의 아들
생몰 : 47년(민중왕 4)∼165년(차대왕 20).  
재위 : 53∼146년.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이름 :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

가계  
       
아버지 : 재사(再思) - 유리명왕의 아들
       
어머니 : 부여태후(扶餘太后)
       
왕후 : ?
              
아들 : 고막근(高莫勤) - 146년에 있었던 차대왕의 왕위 찬탈 이후 살해당한다.
              
아들 : 고막덕(高莫德) - 146년에 있었던 차대왕의 왕위 찬탈 이후 살해당한다.(148년)


53년 음11월 [모본왕 6년 11월 : 태조왕 1년] 두로(杜魯), 모본왕을 죽이고 태조왕을 세움. 
55년 음2월 [태조왕 3년 2월]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후한(後漢)의 침입에 대비함. 
55년 음8월 [태조왕 3년 8월] 남쪽지방에 충해로 흉년이듬. 
56년 음7월 [태조왕 4년 7월] 동옥저를 정벌함. 영토가 동쪽으로 창해 
68년 음8월 [태조왕 16년 8월] 갈사국왕(曷思國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항복 
72년 음2월 [태조왕 20년 2월] 관나부(貫那部)의 패자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정벌 
74년 음10월 [태조왕 22년 10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정벌 
77년 음10월 [태조왕 25년 10월] 부여 사신이 와서 사슴과 토끼를 바침. 
77년 음11월 [태조왕 25년 11월] 수도에 큰 눈이 내림. 
98년 음3월 [태조왕 46년 3월] 책성(柵城)에서 순수하다 서쪽의 계산 
102년 [태조왕 50년] 사람을 보내어 책성(柵城) 백성을 안무함. 
105년 음1월 [태조왕 53년 1월] 부여가 호랑이를 바침. 
105년 음9월 [태조왕 53년 9월] 경기가 맥인(貊人)을 격파함. 
106년 음9월 [태조왕 55년 9월] 질산(質山) 남쪽에서 사냥 
106년 음10월 [태조왕 55년 10월] 동해곡(東海谷)의 관리가 붉은 표범을 바침. 
108년 [태조왕 56년] 봄에 크게 가물었고, 여름이 되어 백성이 굶주리므로 진휼함. 
109년 음1월 [태조왕 57년 1월] 한나라에 사신 
111년 음3월 [태조왕 59년 3월] 통감에 이르기를 3월에 고구려가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군을 공격 
111년 [태조왕 59년]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현도군(玄菟郡)에 복속 
114년 음8월 [태조왕 62년 8월] 남해(南海)를 순수함.  
114년 음10월 [태조왕 62년 10월] 남해(南海)에서 돌아옴. 
116년 음3월 [태조왕 64년 3월] 일식. 
116년 음12월 [태조왕 64년 12월] 큰 눈이 옴. 
118년 음6월 [태조왕 66년 6월] 예맥(濊貊)과 더불어 한나라의 현도군을 침입 
118년 음8월 [태조왕 66년 8월]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효순(孝順) 한 사람을 천거 
121년 음4월 [태조왕 69년 4월] 선비(鮮卑)와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 
121년 음10월 [태조왕 69년 10월] 부여로 행차하여 태후묘(廟)에 제사지냄. 
121년 음11월 [태조왕 69년 11월] 부여로부터 돌아옴. 
121년 음12월 [태조왕 69년 12월] 마한(馬韓)·예맥과 연합하여 현도성을 공격 
121년 [태조왕 69년] 봄에 한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122년 [태조왕 70년] 마한·예맥과 요동을 침. 
123년 음10월 [태조왕 71년 10월] 패자(沛者) 목도루(穆度婁)로 좌보(左輔) 
124년 음9월 [태조왕 72년 9월] 그믐, 일식. 
124년 음10월 [태조왕 72년 10월] 후한에 사신 보냄. 
124년 음11월 [태조왕 72년 11월] 왕도에 지진. 
132년 음7월 [태조왕 80년 7월] 미유(彌儒)·어지류(菸支留)·양신(陽神) 등 
142년 음9월 [태조왕 90년 9월] 환도성(丸都城)에 지진 발생함. 
146년 음7월 [태조왕 94년 7월] 수성(遂成), 왜산(倭山) 아래에서 사냥 
146년 음8월 [태조왕 94년 8월] 후한 요동군(遼東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공격. 
146년 음10월 [태조왕 94년 10월]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 수성(遂成)이 반역  
146년 음12월 [태조왕 94년 12월]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줌.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영리하였다고 한다.

53년에 모본왕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재사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재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 나이가 7세에 불과하여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56년(태조왕 4) 동옥저를 정복하여 성읍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였고,

68년에는 
부여의 망명세력인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였으며, 72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고, 74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는 등, 주변소국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98년의 8개월에 걸친 책성(栅城)의 순수,
102년의 책성 안무(安撫),
114년의 
남해(南海) 지방순행 등을 통하여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갔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후한(後漢)에 대하여 때로는 사절을 파견,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투쟁을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극복하고 서방진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즉, 55년 요서지역에 10성을 쌓게 하여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105년에는 후한의 요동군(遼東郡)을,
111년과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玄菟郡) 및 낙랑군 소속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21년 1월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현도태수 요광(姚光)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항복하는체하면서 오히려요동·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候城)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태수 채풍을 살해하였고,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는 마한·예맥과 더불어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였다.
 

146년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왕은 재위기간 동안 후한의 압력차단과 서방진출 기도를 통하여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68년에는 투항해온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로 삼았고, 74년에는 공파한 주나의 왕자 을음을 고추가에 임명하는 등, 주변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왕권하에 흡수함으로써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또 계루부(桂婁部)에 의한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후한 유주자사 풍환의 침입을 격파하면서 점차 권력을 장악한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까지 노리자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6년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나이 119세로 죽었다. 이때 신대왕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태조왕이 죽은 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165년이라고 한 반면에, 《후한서》에는 121년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 《후한서》에 따른다면 재위도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왕의 업적이 아닌 것이 되기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後漢書
高句麗王妃族考(李基白, 震檀學報 20, 1959)
高句麗王系小考(鄭早苗, 朝鮮歷史論集 上, 1979)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池內宏, 東亞學 3, 1940;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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