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216160604867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2) - 동수의 관직에 숨은 비밀

[고구려사 명장면 13] 

임기환 입력 2017.02.16. 16:06 


지난 회에 잠시 인용했던 동수 묘지 묵서명 중, 이번 회에 필요한 동수의 관직 부분만 다시 환기해보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都鄕侯)"


묵서명에 보이는 동수의 관직은 언뜻 보아도 호화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고구려 땅 평양 남쪽 재령강 유역에서, 그것도 전연에서 쫓겨온 망명객인 주제에 어떻게 이런 거창한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고구려 땅에 살다 묻혔는데, 정작 고구려 관직은 전혀 보이지도 않고 중국식 관직만 잔뜩 나열하고 있다.


안악3호분 묘주도 복원/사진=동북아역사재단


도대체 동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왜 국내성이 아니라 이곳 멀리 재령강 지역에 묻혔던 것일까?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답을 찾기가 어렵지만, 가능한 몇몇 추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해답의 실마리는 역시 묘지 묵서에 적혀 있는 동수의 관직에서 찾을 수 있다. 동수의 관직은 도독호(都督號)+장군호(將軍號)+태수호(太守號)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 동진(東晋)에서 도독에게 준 칭호의 일반적인 관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다소 어색한 면도 있다. 예컨대 도독제군사는 군사를 통괄한 대상 지역이 함께 명기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유주(幽州)도독제군사' 하는 식이다. 그런데 위 동수의 도독제군사는 관할 지역이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여러 면에서 위 동수 관직은 여러모로 의문투성이다.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동수의 관직은 모용황 휘하에 있을 때 받은 '사마(司馬)'직이다. 뒤에 모용인 아래로 들어갔을 때에는 더 높은 다른 관직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모용인이 '차기장군(車騎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 요동공(遼東公)'을 자칭하였기 때문에, 이와 동격인 묵서명에 보이는 관직을 동수가 역임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만 그중 창려태수는 그때 역임한 관직일 수도 있다. 어쨌든 묵서명의 호화로운 관직 대부분은 고구려로 망명한 뒤에 얻은 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호화로운 관직을 동수에게 수여한 주체는 누구일까? 당시 이런 책봉호 관직 체계를 마련한 동진일까? 아니면 동수의 출신국인 전연일까? 동수가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니 의당 고구려왕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중국식 관직을 주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혹 동수 스스로 자칭한 것은 아닐까?


위 동수 관직을 스스로 자칭한 관직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도독제군사에 관할지가 없다는 것도 주요 근거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위 관직이 동진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거나, 혹은 실직이 아닌 허구 관직이라는 근거는 될 수 있어도 자칭의 근거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자칭할 바에야 관할지 역시 근사하게 허구로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진일까? 하지만 동진이 고구려왕을 책봉한 흔적을 현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이미 낙랑·대방 지역이 고구려에 의해 병합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동진이 고구려왕을 젖혀 놓고 일개 망명객인 동수를 책봉하였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아니면 전연일까? 여기에는 약간의 개연성이 있다. 우선 위 관직 중 창려·현도·대방은 '태수'라고 하면서도, 유독 '낙랑상(樂浪相)'이라고 한 점이 의아하다. 상(相)은 태수와 별 차이가 없으나, 왕국(王國)이나 공국(公國)일 경우에 '상'으로 불리운다. 즉 묵서명에 낙랑태수가 아닌 '낙랑상'으로 기록한 점은 동수가 낙랑왕(공)국의 태수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악3호분 부인도 복원/사진=동북아역사재단


이 무렵의 '낙랑공'이라면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으로부터 받은 '영주제군사(營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 고구려왕'이란 책봉호가 떠오른다. 즉 고국원왕이 낙랑공에 책봉되면서 동수는 낙랑상(樂浪相)이 되고, 고국원왕이 받은 정동대장군과 짝하여 동수도 평동장군을 전연으로부터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동수가 망명한 이후 342년(고국원왕 12년)에 전연은 고구려를 침입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미천왕 시신과 왕모(王母), 왕비 등을 인질로 잡아갔다. 고국원왕은 이듬해 동생을 전연에 보내어 아버지 미천왕 시신은 돌려 받았으나 왕모는 귀환시키지 못하였다. 이런 사실은 이미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다.


그 뒤에도 고국원왕은 왕모를 되돌려 받기 위해 전연과의 관계 개선에 무척 애를 썼으며, 이때 전연 출신인 동수 등을 외교 중개자로 활용했을 것이다. 전연도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고구려와 더 이상 긴장관계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 결과 355년에 왕모가 귀환하는 대신 고국원왕이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형태로 양국 관계가 정리되었다. 이때 고국원왕의 책봉호에 맞추어 동수도 '평동장군 낙랑상'이란 관직을 받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나머지 사지절이나 현도·대방태수 관직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일까, 혹은 자칭한 것일까? 정동장군과 낙랑상이 고구려 왕권과 관련되어 획득한 관직이라면, 과연 나머지 관직들도 어떤 형태로든지 고구려 정권과 연관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망명객이 비록 명목상이라도 이렇게 호화로운 관직을 마음대로 자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당시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전쟁에서 수도 국내성이 파괴된 이후 평양 지역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경영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중국식 벽돌무덤을 사용하는 등 아직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과거 낙랑·대방 지역 출신 토착 세력을 통제하는 데 망명객 동수를 활용하기 위해 그를 이 지역 대표자로 내세웠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동수의 관직이 그렇게 호화롭게된 연유가 아닐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왜 고구려가 중국식 관직을 동수에게 부여했는지는 아직 잘 풀리지 않은 문제다. 고구려 정권이 의도적으로 중국식 관직 체계를 이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어쩌면 위 동수의 관직은 그것을 획득한 계기가 여럿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여전히 동수가 자칭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개중에는 그 묵서명의 관직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세의 기원을 담은 무덤 속에서만 그렇게 호화로움을 과시했다는 견해가 흥미롭다. 그러나 과연 죽은 뒤의 염원만을 바라는 묵서에 그친 것일까?


이렇게 동수의 간단한 묘지 묵서명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풀어가야 할 역사의 숨겨진 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이 특히 금석문 자료가 갖는 흥미진진한 면모다. 동수 관직에 담겨진 역사적 사실을 풀어갈 때, 우리는 한 망명객의 행적만이 아니라 고구려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도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안악3호분이 4세기 고구려사의 비밀을 풀어갈 귀중한 자료가 되는 이유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