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511150405434
엄청난 크기와 독특한 모양 광개토태왕비에 얽힌 비밀
[고구려사 명장면 19]
임기환 입력 2017.05.11. 15:04
1930년대 광개토왕비 1면 모습
414년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을 산릉에 모시고, 그 훈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비를 세웠다. 그 비는 내내 그 자리에 서서 장수왕의 뜻대로 광개토왕의 훈적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다. 당대 고구려인들이 그 비에 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후세에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몇 회에 걸쳐 하나씩 풀어보자.
필자가 광개토왕비를 처음 본 순간 들었던 가장 큰 궁금증은 왜 비(碑)가 저렇게 생겼을까였다. 왜냐하면 그 생김새가 워낙 남달랐기 때문이다. 또 비의 규모도 동아시아에서 문자가 새겨진 비로는 견줄 사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 이렇게 독특한 형태와 크기를 갖추게 된 데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걸 알아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광개토왕비 받침돌 모습
광개토왕비는 받침돌(臺石)과 몸돌(碑身)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받침돌 밑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다. 받침돌은 화강암으로 집안 일대에 흔한 암석이다. 비의 몸돌을 지탱하고 있는 받침돌은 길이 3.35m, 너비 2.7m 크기의 네모진 모양으로, 여기에 비가 자리 잡을 위치에 홈을 새겼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애초에 새긴 홈과는 어긋나게 비가 세워져 있다. 무게가 34t에 이르는 워낙 무거운 몸돌이기 때문에 처음 계획했던 위치에 세우는 것이 어려웠던 모양이다. 더욱이 받침돌은 남아 있는 부분이 세 조각으로 깨져 있다. 역시 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깨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까지 몸돌을 넉넉하게 지탱해온 게 신통하다.
몸돌은 거대한 사각기둥 모양으로, 높이가 6.39m이며, 너비는 1.3~2.0m로 윗면과 아랫면이 약간 넓고 허리 부분이 약간 좁은 형태이다. 네 면 각각의 형태와 크기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부러 그런 모양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본래의 원석을 적당히 여기저기 다듬는 수준에서 가공을 하다보니 그런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면 모두에 글자를 새겼다. 이런 모양은 충북 중원군에 있는 충주고구려비 정도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인 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고구려인들은 원래부터 비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집안 고구려비는 전형적인 비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집안 고구려비를 언제 만들었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광개토왕대로 추정하며 필자도 그렇게 본다. 따라서 광개토왕비와 같은 형태가 고구려비의 일반적인 양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사각기둥의 4면비 형태로 만들어진 첫 사례가 광개토왕비일 듯하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를 건립할 때 이런 거대한 4면비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인지, 아니면 비 건립 과정 중 어떠한 상황에서 이러한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몸돌의 전체 모습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글자를 새긴 비면도 판판하고 매끈하게 다듬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이다. 울퉁불퉁한 비면은 글씨를 새기기조차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걱정이 절로 들 정도로 굴곡져 있다. 글자를 새길 비면을 판판하게 다듬는 것은 사실상 비 제작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광개토왕비를 세운 고구려인들은 이런 점을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하다. 왜 그랬을까?
생김새만 남다른 게 아니다. 몸돌의 재질도 다른 사례가 없는 독특한 암석이다. 이를 두고 한동안 각력응회암이니 현무암질 화산암이니 하는 논란이 있었는데, 2005년에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조사한 결과 연한 녹색의 기공(氣孔)을 가진 안산암질 또는 석영안산암질 용결 래필리응회암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또한 광개토왕비는 인공적으로 채석하여 가공한 흔적이 별로 없는 큰 암괴로서, 이 비석의 원석은 아마도 강이나 계곡에 자연적으로 놓여 있었던 암괴를 운반하여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이 비의 넷째 면에는 운반 중에 일부 표면이 긁힌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서 있는 집안 지역에는 이런 암석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 원석을 가져온 지역이 어느 곳일까? 지질 조사 결과 광개토왕비의 원석과 동일한 암석이 분포하는 지역은 집안의 운봉·양민 일대, 압록강변 북한의 어느 곳, 집안과 환인 중간 일대, 환인의 오녀산성 일대, 백두산 지역 등인데, 조사팀은 운반상의 조건 등을 고려하여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운봉·양민 일대로 추정하였다. 이로써 광개토왕비 원석의 재질과 출토지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비를 만들 때 기공(氣孔)을 갖고 있어 비면을 다듬기 쉽지 않은 이런 암석을 왜 굳이 선택했을까? 집안의 고구려 유적 중에서 응회암이란 돌을 사용한 것은 광개토왕비가 유일하다. 집안 일대에는 수많은 적석총을 축조할 때 사용한 화강암이나 석회암이 많은데, 왜 굳이 집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렵게 응회암 암괴를 선택해서 운반해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두 가지 개연성을 생각해보자. 먼저 화강암의 경우 비를 만들 만큼 큰 암괴가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장군총의 호석으로 사용된 화강암 암괴석은 광개토왕비보다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크기를 갖고 있다. 면도 반반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신으로 사용하기에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다음, 화강암이 단단해서 글자를 새기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장군총 석재를 다듬은 기술을 생각하면 적절한 답은 아닐 듯싶다. 그리고 다듬기가 쉬워서 응회암을 선택한 것이라면 왜 광개토왕비의 비면을 울퉁불퉁하게 거의 다듬지 않은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응회암을 선택한 점이나, 또 비면을 반반하게 다듬지 않은 점은 그럴만한 어떤 이유가가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한 면에 남아 있는 운반할 때 긁힌 자국조차도 다듬어내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광개토왕비의 독특한 형태나 덜 다듬은 비면 상태에서 인위적 가공을 최소화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이 비신석이 갖고 있던 본래의 어떤 특성을 그대로 살리려는 의도는 아닐까? 비신으로는 부적합한 상태, 앞에서 언급한 광개토왕비 몸돌에 대한 여러 궁금증들은 이 몸돌이 애초에는 비(碑)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석조물이 아니라는 개연성을 생각해보게 한다.
만약 광개토왕비의 몸돌이 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목적으로 이곳으로 옮겨져 세워지게 되었을까? 이때 광개토왕비신의 톡특한 생김새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겠다. 사실 광개토왕비를 보는 많은 이들은 마치 종교적인 선돌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술회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 인상을 갖고 있는데, 광개토왕비와 거의 유사한 모습을 갖고 있는 충주고구려비를 비가 발견된 마을에서는 일찍부터 선돌로 숭배하였다는 주민들의 전언(傳言)도 귀담아들을 만하다고 본다.
광개토왕비의 원석도 광개토왕비를 세우기 이전부터 국내성 일대에서 이미 어떤 종교적 성격을 갖거나 신앙과 숭배의 대상물로서 기능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보고자 한다. 이런 추정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면, 왜 이 원석이 광개토왕비의 비신석으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겠다.
이는 비문에 보이는 광개토왕의 정치적 위상, 즉 태왕권(太王權)의 성장과 관련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문에 보이는 고구려 태왕은 단지 현실 정치세계의 최고 통치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문에서 고구려 왕실 계보가 천제(天帝)와 연결되는 신성한 혈통임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실제 조상인 추모왕은 고구려 시기 내내 종교적 대상이었다. 따라서 추모왕의 후손인 고구려왕은 천제(天帝)에 대한 종교의례의 주관자이기도 하다.
특히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라는 업적을 이룬 광개토왕은 바로 그러한 천제의 혈통이 갖는 신성한 역할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인물로서 숭배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 된다. 그래서 기왕의 종교적 대상물을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록하는 비신석으로 활용함으로써 광개토왕의 위상을 더욱 높이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여러 궁금증을 갖고 다소 상상력이 많은 추정이었지만, 이렇게 독특한 비의 외형에서부터 당대 고구려인이 담고자 했던 정치적·이념적 의도를 살펴보는 것이 비문이 전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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