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15_0020


백제의 농업 생산력


[六年]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1 多婁王 6年


九年春二月, 命有司修隄防. 三月, 下令勸農事夏.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仇首王 9年


九年春二月, 命國人開稻田於南澤.

『三國史記』卷24, 「百濟本紀」2 古爾王 9年



[다루왕(多婁王) 6년(33)] 2월 남쪽 주군(州郡)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1 다루왕 6년


[구수왕(仇首王) 9년(222)] 봄 2월에 담당 관청에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3월에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구수왕 9년


[고이왕(古爾王) 9년(242)] 봄 2월에 국인(國人)들로 하여금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토록 하였다.

『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9년



이 사료들은 백제 초기 수리 관개시설을 정비한 후 그에 따라 수전(水田)이 확대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기사들이 모두 『삼국사기』에서 백제 초기의 것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기년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 자료들은 백제 초기에 국가가 수리 관개시설 건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저수지 또는 큰 규모의 수리 시설을 축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적어도 3세기 초부터 논을 이용한 수전 농법(水田農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유적에서 발견된 삼국 시대 경작 유구를 통해 보면 4~5세기에도 여전히 밭 전체를 묵힌 뒤 경작하는 휴한 농법(休閑農法)이 관행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밭농사가 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 전하는 백제의 농경 관련 기록을 보면, 백제의 토지가 ‘하습(下濕)’하여 오곡, 잡과, 채소를 비롯한 여러 작물이 많이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에서 수전 농사도 발달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수전은 밭농사보다 거의 2배 이상의 수확이 가능하기 때문에 수전 개발은 농업 생산성의 증대와 직결되었다. 따라서 백제 역시 초기부터 수전의 개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백제 초기 기록은 기년에 있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백제 초기의 사정뿐 아니라 백제 농업 생산력의 발달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510년(무령왕 10년) 봄에 제방을 쌓고 유망민을 귀농(歸農)시켰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무령왕이 제방의 축조와 수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수전 농업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미사리 삼국시기 밭 유구의 농업」,『역사학보』146,김기흥,역사학회,1995.

「백제 농업기술 연구」,『한국고대사연구』5,전덕재,한국고대사학회,1999.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이현혜, 일조각, 1998.

『한국고대사회경제사』, 전덕재, 태학사, 2006.

「경제구조」, 양기석, 국사편찬위원회, 1995.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sg_023r_0030_0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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