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35_0020


발해의 교통로(5도)와 신라도


龍原東南瀕海, 日本道也. 南海, 新羅道也. 鴨淥, 朝貢道也. 長嶺, 營州道也. 扶餘, 契丹道也.

『新唐書』卷219, 「列傳」144 北狄 渤海


賈躭古今郡國志云, “渤海國南海⋅鴨淥⋅扶餘⋅柵城四府 並是髙句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 凡三十九驛”.

『三國史記』卷37, 「雜志」6 地理 4



용원(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日本道)이다. 남해(南海)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압록(鴨淥)은 조공도(朝貢道)이다. 장령(長嶺)은 영주도(營州道)이다. 부여(扶餘)는 거란도(契丹道)이다.

『신당서』권219, 「열전」144 북적 발해


가탐(賈躭)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이르기를, “발해국(渤海國)의 남해(南海)⋅압록(鴨淥)⋅부여(扶餘)⋅책성(柵城)의 4부(府)는 모두 옛 고구려의 땅이다. 신라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柵城府)에 이르기까지 무릇 39역(驛)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37, 「잡지」6 지리 4



이 사료는 발해의 교통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북송(北宋) 대에 구양수(歐陽脩, 1007~1072) 등이 편찬한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발해에는 일본도(日本道), 신라도(新羅道), 조공도(朝貢道), 영주도(營州道), 거란도(契丹道) 등 모두 5개의 교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의 말미에도 당(唐)나라 사람인 가탐(賈躭)이 801년 지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하여 발해의 교통로를 서술하고 있다.


『신당서』 발해전에서 발해의 주요 교통로와 관련해 일본도는 용원(龍原), 즉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의 동남쪽 연해라고 표현하였다. 동경용원부는 지금의 중국 지린 성[吉林省] 혼춘시(琿春市)에 위치한 팔련성(八連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도는 육로와 해로로 되어 있으며, 러시아 연해주에 위치한 크라스키노 성이 일본도 해로의 항만 시설이 있던 곳이라 한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크라스키노 성에서 동해를 거쳐 일본으로 왕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압록(鴨淥)이라고 되어 있는 조공도는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서 당나라로 가던 교통로를 지칭한다. 서경압록부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현재는 중국 지린성의 임강(臨江) 일대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조공도는 해로를 이용해 요동 반도의 해안을 따라 등주(登州)에 이르는 노선과 더불어 상경(上京)이나 중경(中京)에서 서경(西京)에 이르는 육로가 상정되고 있다. 『신당서』 지리지 기미주(羈縻州) 말미에 수록된 『도리기(道里記)』에서도 조공도가 수로와 육로로 이루어져 있었음이 언급되어 있어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영주도의 경우 『신당서』 발해전에서 장령(長嶺)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이로 보아 영주도는 상경에서 오늘날 지린성 화전시(樺甸市) 동쪽 후이파허 강[輝發河] 남안에 위치한 장령부(長嶺府)를 거쳐 당나라 영주 도독부(營州都督府), 즉 중국 조양(朝陽)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영주도는 발해에서 당나라의 동북 변경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부여(夫餘)와 관련되어 있는 거란도는 아직까지 노선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부여부(夫餘府)의 위치가 논란인데, 지린성 농안시(農安市)가 부여부라는 견해가 많지만 아직까지 농안 일대에서 발해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아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거란도’라는 명칭을 고려하면 이 길은 지린 성 일대에서 거란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발해와 신라 수도 경주를 잇는 교통로가 바로 신라도이다.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따르면 신라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柵城府)까지 이르는 동안 39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한다. 천정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이며, 책성부는 동경용원부를 가리킨다. 가탐이 『고금군국지』를 지은 것이 801년이므로, 『고금군국지』에 실린 신라도와 관련한 내용은 9세기 전후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9세기를 전후한 무렵에는 신라도 가운데 동경용원부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로가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육로뿐만 아니라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노선 등의 해로도 신라도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도의 존재는 발해와 신라가 줄곧 대립적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양국 사이의 왕래가 활발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일본도를 비롯한 발해의 5도(道)는 대체로 육로와 수로가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고, 발해 주변의 모든 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교통로가 구축되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상당수의 교통로는 상경, 서경, 동경 등 발해의 5경(京)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 점은 결국 발해의 교통로가 5경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달해 나갔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발해 문화에서 고구려적인 요소, 당나라의 요소, 말갈적인 요소, 중앙아시아계 요소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신라계 문화의 유입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도 결국 5경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당시 발해의 활발했던 국제 교류 관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발해의 교통로와 오경」,『사림』 72-6,기와카미 히로시,교토대학 문학부 사학연구회,1989.

「8~10세기 동아시아 속의 발해 교통로」,『한국사학보』 24,김은국,고려사학회,2006.

「발해의 5경과 교통로의 기능」,『한국고대사연구』 63,윤재운,한국고대사학회,2011.

「발해 ‘동경’지역의 고구려 문화 요소」,『고구려연구』25,임상선,고구려연구회,2006.

「발해의 서경압록부 연구」,『한국고대사연구』 14,한규철,한국고대사학회,1998.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윤재운, 경인문화사, 2006.

『발해의 대외관계사』, 한규철, 신서원, 1994.

『발해의 5경과 영역 변천』, 한규철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발해의 교통」,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2007.


관련 이미지

발해 상경성 유적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levelId=ti_011_0020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o_015r_0010_0020_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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