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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주민은 누구였을까?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 한국사 강사 | gosilec@lec.co.kr 승인 2014.10.22 14:37:53
1. 주민 구성 논증 이유
발해사의 쟁점 가운데 발해가 과연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였는가. 고구려와는 또다른 말갈족의 국가였는가 하는 문제가 핵심 사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는 남한 및 일본 등지에서 특히 관심을 갖고 연구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발해국의 책봉과 조공에 따른 왕조의 자주성 문제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주민 구성 문제는 이와는 별개로 실증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학문적이면서 발해라는 나라의 본질을 밝히는데 있어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해의 주민구성 문제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인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의 왕조였는가 하는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말갈이 고구려와 다른 독자적 종족이었다면 만주지역에서 부여와 고구려에 이어 또 다른 종족에 의한 왕조 개창을 의미한다.
2. 발해 주민 구성에 대한 기록 - 구당서(945)와 신당서(1044)의 차이
발해의 주민 구성과 관련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가 약간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구당서는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에 대하여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발해의 고구려 계승관계를 뒷받침하고 있다.
반면에 신당서는 건국자 대조영을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자이니, 성은 대씨이다.’고 하여 대조영 집단이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에 부속된 무리였으나, 종족적으로는 마치 고구려와 다른 ‘속말말갈’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전자는 남북한학자들에 의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입증하는 유력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고, 후자는 중국학자를 비롯한 말갈 지지자들에 의해 신뢰를 받고 있는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3.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 - 일제 학자들과 남한 학계의 통설
한편 발해를 다민족 국가로 규정하고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인이라는 시각도 제기되어 왔으며, 현재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적 발해주민구성론은 발해사가 고구려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국가가 아니라 말갈사, 즉 만주사로 봄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규철,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 말은 한규철 교수가 발해사를 말갈사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다.
원래 위와 같은 인식은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가 1933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을 발굴한 이후에 내놓은 시각으로 우리 학자들이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시라토리는 ‘(발해의) 왕조 및 상류사회를 조직한 자가 고구려인’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의 논거는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발해는) 옛 고구려의 땅을 다시 찾아 거하고 있다.’라든가 ‘고구려국왕 대흠무가 말하다.’ 라는 기록과, 일본에 보낸 85명의 발해 정사(正使) 중에서 26명이나 옛 고구려의 성과 같은 고씨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高句麗, 高麗)라고도 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반면에 도리야마는 발해건국자 대조영을 말갈족 출신으로 인식하여 발해의 말갈족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만 속말말갈 및 백산말갈(둘 다 백두산 근처)이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보고, 대조영을 백산말갈 출신이라 하여 신당서의 속말말갈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4. 발해의 지배층, 피지배층 모두 고구려인 - 남한의 일부 학자 및 북한 학계의 통설
그러나 발해의 주민 구성이 다원적이 아닌 대부분 고구려인이나 말갈인 어느 한쪽의 일원적이었다는 견해도 강력하다. 중국과 러시아의 말갈설과 한규철과 북한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설이 그것이다.
물론 발해의 고구려유민설에서 흑수부(러시아 흑룡강 근처)의 이질성은 인정하는 바다. 한규철 교수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였음을 논증하였다.(1988)
북한에서도 초기에는 박시형 등을 중심으로 초기 시라토리의 견해를 수용하여 피지배층 다수가 말갈족이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국종 등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발해사연구실을 중심으로 옛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이른바 ‘발해본토’인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후손인 고구려인들이었다고 하여 오늘날 북한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결국 남한에서 새롭게 등장한 주장과 북한학자들의 주장이 같아지게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고구려는 약 700여 년간 존속한 국가였다. 이들은 나라가 망했어도 스스로 고구려인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발해가 건국되자 발해의 주민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를 고구려유이민과 말갈족의 연합으로 구성된 국가였다고 하는 이원적 주민구성론은 여전히 남한과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통설이다.
5. ‘말갈’의 본질과 의미
결국 중요한 논쟁의 핵심은 ‘말갈’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이다. 말갈이라는 명칭은 말갈족 주민들이 스스로 부른 말은 아니었다. 이는 중국의 한족(漢族)이 부른 타칭으로 변방에 사는 촌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었다.
말갈족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말갈’이라는 기록 역시 중국인들이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들은 말갈의 범칭 및 타칭의 의미는 인정하지만, 말갈의 실체를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발해사의 권위자인 남한의 한규철 교수는 말갈을 고구려 변방 주민들의 비칭이었기에 이들은 예맥과 부여의 후손이며 고구려 주민이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말갈로 불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려 변방인이었다고 보아 발해의 고구려 유민설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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