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5165.html
인류를 홀린 ‘겨울왕국’의 신화와 진실
등록 :2019-05-24 06:01 수정 :2019-05-24 19:40
[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9) 북방계 신화와 유적
북방의 어딘가에 우리와 다른 문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난다. 겨울왕국에 대한 믿음은 일부 오해는 있었지만, 헛된 망상은 아니었다. 고고학 자료는 머나먼 북극해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와 이웃했던 시베리아와 만주 북방에 매우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살아남았던 이들 겨울왕국의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했던 역사의 일부다.
‘겨울왕국’이라면 얼마 전 인기를 얻은 디즈니 만화영화나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 같은 낭만적인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반대로 우리 고대사에서 ‘추운 북방 사람’이라고 하면 아마도 말갈, 읍루 같은 주변 지역을 침략하는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얼핏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런 이미지 사이에는 지난 수천년간 이어져 온 북방지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환상이 잘 드러나 있다.
서양 문화에서 겨울왕국에 대한 믿음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인은 북쪽 세상 끝에 히페르보레아(Hyperborea)라는 나라가 있는데, 질병도 없고 늙지도 않는 유토피아로 생각했다. 심지어 태양의 신 아폴론이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할 정도이니, 그리스에서 이 북쪽의 겨울왕국에 대한 환상은 대단했다.
16세기 메르카토르의 지도에 표현된 히페르보레아. 지도 한가운데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히페르보레아다. 메르카토르 지도는 1595년 처음 제작됐고, 이 지도는 1623년에 만들어졌다. 출처 위키피디아
‘겨울왕국’에 대한 환상은 북극권의 지리가 완전히 알려진 20세기 초반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다. 사실 시베리아를 탐험하던 러시아인들도 지난 20세기 초반까지 150년 넘게 북극해의 신비로운 땅을 찾아서 헤매었다. 18세기 말에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인 시베리아의 야쿠티야(야쿠트)에서 모피 사냥꾼으로 활동하던 산니코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새로운 모피 동물을 찾아 북극권을 헤매던 중에 동부 시베리아 북쪽의 노바야시비리섬 북쪽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난데없이 거위 떼가 날아올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 덮인 빙하 북쪽으로 푸른 숲으로 뒤덮인 땅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북극권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당시에 산니코프의 발견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러시아의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이 섬을 다시 발견하는 자에게 이 섬을 주겠다고 선언까지 할 정도였다. 그 뒤로 수많은 탐험가가 경쟁적으로 이 섬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산니코프 자신도 이 섬을 찾아다니다 1811년께 실종되었고, 120년이 지나서야 그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비행기로 북극을 답사할 수 있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 소련 학계에서는 산니코프의 섬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산니코프는 부정확한 육안측량법으로 조사한 것이고 수개월을 빙하 속에 있다가 환각을 봤을 가능성이 크다. 산니코프 이야기는 수천년을 이어온 북쪽 유토피아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 소련의 공식적인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극해의 낙원을 찾는 사람들은 있다. 북극권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수풀이 우거진 낙원이 있다는 지구공동설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만주에서 발견된 겨울왕국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도 북방 지역을 신성시하는 ‘겨울왕국’에 대한 믿음은 강했다. 부여와 삼국은 공통으로 자신의 기원을 북방이라 믿었다. 소위 ‘북방계 신화’라는 이 이야기들은 하늘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서사 구조인데, 북방 지역은 하늘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말갈족의 후예인 나나이족을 비롯하여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에서도 북방기원론은 널리 퍼져 있다. 일본의 기마민족론도 비슷한 맥락이니 한민족 북방기원설이 널리 확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발굴 결과 러시아와 접경한 만주의 북쪽 끝에서 실제 겨울왕국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만주의 동북쪽 끝에 러시아와 접경한 지역엔 남한의 3분의 2 정도 크기의 광활한 평원지대인 싼장(三江)평원이 있다.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와 접경한 이 지역은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1~18도에 이르고, 1년에 7~8개월이 겨울인 그야말로 동토지대이다. 겨울에 워낙 춥고, 여름이 되면 온통 소택지로 뒤덮이는 곳이라 최근까지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베리아의 동토지대 못지않은 곳이다.
겨울 펑린성터의 입구. 왼편엔 담벼락이 남아 있고, 정면에 보이는 산에는 성 주민들이 천제를 지내던 제사터가 있다. 강인욱 제공
최근 이 지역의 고대 유적을 조사한 결과 수많은 부여 계통의 주민이 거대한 성터를 만들어서 살았음이 확인됐다. 대표적인 유적인 펑린성터의 경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4m에 이른다. 성벽의 둘레가 6.3㎞에 전체 면적이 11만㎡로 백제 풍납토성의 10배 크기이니 그 규모가 엄청나다. 단순히 규모만 큰 것이 아니다. 펑린성터 가운데는 궁궐지를 중심으로 주변을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서 몇 차례에 걸쳐 성벽을 쌓았다. 그러니 실제 외적이 침략할 경우 미로 같은 성을 통과해야 하는 복잡한 구조이다. 거대한 성터가 1980년대가 되어서야 발견된 이유는 이 지역이 너무나 인적이 드문 곳이었기 때문이다.
펑린성터 중심에 있던 궁궐터 복원도. 강인욱 제공
이 유적을 발굴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발굴 전엔 만주의 추운 지역에서 사냥을 주로 하던 말갈인의 유적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거대한 성터 안에서 부여 계통의 토기와 온돌을 한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아직 싼장평원의 겨울왕국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 전체 규모마저도 제대로 상상하기 어렵다. 지난 1998~2002년 사이에 싼장평원의 15분의 1에 해당하는 극히 일부 지역을 조사한 결과 펑린성터를 비롯하여 200여개의 성터가 발견되었다. 그러니 전체 싼장평원에는 고구려나 부여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거대한 문명을 이루며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궁벽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비결은 싼장평원 일대의 비옥한 토양에 있다. 싼장평원은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거대한 흑토 지대가 발달해 있다. 2천년 전부터 부여계의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견디는 온돌을 만들고, 주변의 호전적인 말갈 세력을 막아내는 성터를 건설하였다. 힘든 환경이었지만 세상 어디보다 비옥한 흑토 지대에서 잡곡을 키우며 그들만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최근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싼장평원에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그 쌀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이 유적에서 글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고고학 자료로 보면 부여 계통임은 분명하다. 말갈인들은 다른 토기를 사용했으며 이러한 거대한 성터나 온돌을 만든 적도 없다. 부여 계통의 사람들의 최북단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말이다. 게다가 남한 강원도 지역의 철기시대인 중도식토기문화에서 발견되는 ‘철(凸)자형 주거지’(주거지 한쪽에 문을 낸 형식), 무늬 없는 단지, 집의 온돌과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흡사하다. 직선거리로 1천㎞가 넘는 두 지역 간의 이러한 유사점은 백두대간을 따라서 추위에 적응하며 살았던 부여 계통의 주민들 사이의 이주와 문화교류의 결과였다. 당나라 때 중국 기록에는 부여의 북쪽에 그들의 일파인 ‘두막루’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아마 이들은 역사기록의 두막루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펑린성터의 온돌 주거지. 강인욱 제공
강원도와 유사한 펑린성터의 철(凸)자형 주거지. 강인욱 제공
부여, 강원도 지역과 유사한 펑린성터의 질그릇. 강인욱 제공
겨울왕국은 멀리 있지 않았다
싼장평원과 같은 북방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오히려 더 활동력이 좋고 활발해지기 때문에, 남쪽의 사람들에게는 겨울에만 나타나는 ‘겨울왕국’의 사람들로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추운 북방 초원 지대나 삼림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길이 없어서 겨울에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고대 기록에는 숙신(말갈의 조상)이 사는 곳은 길이 험하여 수레가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겨울이 오면 북방의 사람들은 썰매에 여러 물건을 싣고 얼어붙은 강을 따라 주변 지역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 식량이 부족한 때에는 침략을 하기도 했다. 추위에 잘 적응이 된 북쪽의 사람들은 겨울의 전쟁이 훨씬 유리했다.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가 상상했던 히페르보레아도 바로 다름 아닌 유라시아 초원에서 살다가 북쪽으로 피신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자 분석 결과 알타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목문화인 파지리크문화인과 제일 유사한 사람들은 시베리아 원주민인 한티와 만시족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티족의 전통적인 물건에서 2500년 전 파지리크문화인들의 요소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시대(기원전 9~3세기)에 살던 유목민족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추운 북쪽 지역으로 도망갔다. 이후 다시 세력을 키워서 초원을 침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동부 시베리아의 북극권에 사는 야쿠트(사하)인들의 경우도 혈통과 언어로는 투르크(터키)계에 해당한다. 원래 초원 지역에 살다가 점진적으로 밀려나서 현재의 툰드라(한대) 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야쿠트인들의 신화에는 꽃이 우거진 따뜻한 초원이 주요 무대일 수밖에 없다. 산니코프가 북극해에서 푸른 낙원을 찾아다닌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북방의 어딘가에 우리와 다른 문명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타난다. 우리에게 친숙한 북방기원론은 사실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겨울왕국’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겨울왕국에 대한 믿음은 일부 오해는 있었지만, 헛된 망상은 아니었다. 고고학 자료는 머나먼 북극해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와 이웃했던 시베리아와 만주 북방에 매우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살아남았던 이들 겨울왕국의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했던 역사의 일부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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