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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부체제의 성립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1) 성립 > (2) 나부체제의 성립


현도군이 설치되면서 압록강 중류지역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최근 漢代 土城址(한대 토성지)가 압록강 중류일대 곳곳에서 발견되었는데, 현도군이나 속현의 治所(치소)로 추정된다.047) 토성지는 대체로 주변에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진 교통로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에는 현도군 설치 이전부터 유력한 那(나)집단이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은 유력한 나집단이 성장한 교통로상의 요지에 군현의 치소를 설치하여 토착집단을 통제하였던 것이다.


현도군 설치 이후 토착사회의 변화상은 전하지 않지만, 낙랑군의 예를 통해 대체적 양상을 추론할 수 있다. 고조선은 원래 法禁(법금)이 8조에 불과하였고 문도 잠그지 않고 살았는데, 군현 설치 이후 한의 상인과 군현의 관리가 진출하면서 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다.048) 또한 武帝(무제)대에 설치된 西南夷(서남이)의 한군현들은 軍役(군역)과 租賦(조부)를 부담하였는데, 낙랑군의 토착민 역시 이러한 부담을 짊어졌을 것이다.049) 그리하여 한군현의 일방적인 수탈로 토착사회에는 급격한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현도군 지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현도군 설치 이후 한군현과 결탁한 일부 那集團(나집단)은 한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다른 토착집단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050) 대다수 토착민은 한군현의 일방적인 수탈과 지배에 강하게 반발하였을 것이다.051)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다시 유력집단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연맹체를 형성하고, 마침내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치소를 구려 서북의 蘇子河(소자하) 방면으로 물리쳐 한군현의 직접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났다.052)


그런데 현도군은 夷貊(이맥) 곧 句驪(구려)의 무력침공을 받고 쫓겨났다. 현도군을 퇴축시킬 무렵 압록강 중류지역에는 이전의 예군남려집단보다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연맹체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나집단들이 위만조선의 압력이나 한군현의 지배를 받으면서 결속력을 키워온 결과이며, 우세한 나집단이 주변 지역집단을 복속·통합하여 확대된 지역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곧 나집단은 현도군 퇴축을 전후하여 보다 확대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태조왕대의 朱那(주나)나 藻那(조나)와 같이 王이라는 정치적 수장에 의해 통솔되고 상당한 무장력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치집단은 정치적 수장이 있고 무장력을 갖춘 독자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에서 ‘那國’(나국)이라 할 수 있다.053) 따라서 이 시기의 연맹체는 나국의 결집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那國聯盟體’(나국연맹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消奴集團(소노집단)이 나국연맹체의 맹주권을 장악하였다.054) 소노집단의 본거지로 비정되는 桓仁(환인)일대는 농경과 군사방어에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055) 또 환인지역에서는 大甸子(대전자) 청동단검묘를 비롯하여 청동기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며, 渾江(혼강)과 그 지류 유역에는 초기의 적석묘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056) 환인일대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다수의 주민집단이 거주하였고,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라 나집단이 곳곳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들 사이의 통합과 복속으로 소노집단이 등장하여 나국연맹체의 맹주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소노집단은 나국연맹체의 구성집단뿐 아니라 환인일대의 지역집단도 강력하게 장악하지 못하였다. 이에 漢은 연맹체의 맹주인 고구려왕에게 북·피리·악공을 내려주어 대표성을 인정하면서, 각 집단에게 朝服(조복)과 衣幘(의책)을 주면서 개별적 관계를 맺는 등 다양한 형태로 영향력을 미쳐왔다.057)


이처럼 현도군 퇴축 이후 이 지역의 주민집단은 소노집단을 중심으로 나국연맹체를 이루었지만, 각 집단은 현도군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는 분립적 상태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각 집단간 통합과 복속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집단간 통합·복속은 외압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우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이 무렵 부여계 이주민집단의 유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백제 건국설화의 서두에서 보듯이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이주민집단의 유입 및 토착세력과의 결합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058) 朱蒙集團(주몽집단)은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059) 주몽집단은 沸流水(비류수/渾江/혼강)의 卒本(졸본)지역에 정착하여 召西奴(소서노)·毛屯谷(모둔곡) 등 토착집단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대함으로써 소노집단과 맹주권을 놓고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다. 주몽설화 가운데 주몽과 沸流國王 松壤(비류국왕 송양)의 쟁투기사는 이를 설화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松壤(송양)의 ‘壤’(양)은 那(나)·奴(노)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송양은 ‘松(송)의 땅’ 곧 ‘松那·松奴’(송나,송노)로서 消奴部(소노부)를 가르킨다.060) 이처럼 주몽집단은 토착집단과의 연합을 통해 소노집단을 누르고 나국연맹체의 맹주로 등장하였다.061)


새로운 연맹주로 등장한 주몽집단 곧 桂婁集團(계류집단)은 강력한 군사 조직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집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환인일대는 소자하 방면의 현도군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군사방어뿐 아니라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을 제어하기에 불리하였다. 이에 계루집단은 농경·어로·수렵에 적합한 생산력 기반과 군사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춘 國內地域(국내지역)으로 천도하였다.062) 계루집단은 국내천도 이후 谷(곡)·川(천) 등 규모가 큰 집단과 연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原(원)·澤(택)·野(야)로 표기되는 개별 나집단을 賜姓(사성) 등의 방법으로 직접 편제하고,063) 나국 이상의 독자적 정치세력을 해체시켜 강력한 세력기반을 확보하였다. 계루집단은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에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한편 현도군 퇴축 이후 卒本(졸본)과 국내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나국이 형성되고 이들간의 통합과 복속으로 보다 큰 단위정치체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통합·복속의 과정을 거쳐 이 지역의 주민집단은 국내지역의 계루집단과 졸본(沸流水/비류수)지역의 소노집단을 비롯하여 그 외 몇몇 큰 단위정치체로 통합·복속되었다.064) 그렇지만 계루집단을 제외한 단위정치체는 내부의 나국들이 여전히 상당한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의 적석묘 분포상황으로 보아 계루집단·소노집단 이외의 단위정치체는 대체로 禿魯江(독로강) 아래와 운봉댐 위의 압록강 유역과 그 지류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지역에는 곳곳에 기단적석묘가 분포되어 있어 나집단·나국으로 성장한 집단이 각 지역별로 몇몇 상정되지만 이들간의 우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나국간의 통합으로 형성된 단위정치체 내부에는 여전히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루집단이 우월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단위정치체를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제하였다. 계루집단은 新(신)의 王莽(왕망)이 고구려 군대를 동원하여 胡(호)를 정벌하려던 계략을 물리친 뒤,065) 현도군의 高句麗縣(고구려현)을 공격하여066) 한의 분리통제책을 저지시켜 각 단위정치체의 대외적인 운동력을 통제하여 일원화하였다.


① 한나라 때에 북·피리·악공을 내렸고, 항상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高句麗令(고구려령)이 名籍(명적)을 관장하였다. ② 뒤에 차츰 교만해져 郡(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 곳에 두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 갔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책구루)라고 부른다. 구루는 句麗(구려)의 말로 성이라는 뜻이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①은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의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②는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이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각 정치세력이 한군현과 개별적으로 맺어왔던 독자적인 대외교섭권은 책구루라는 단일창구로 일원화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권력의 성립을 의미한다.067) 1세기초 왕망의 계략을 분쇄한 것과 32년 한에 사신을 보내 ‘王’을 칭하였다는 기록으로068) 보아 계루집단은 1세기 전반경부터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권력으로 등장하였던 것 같다. 태조왕 20년(72)과 22년 藻那(조나)와 朱那(주나) 정벌은 이러한 과정이 계루부왕권과 하부단위정치체의 결합으로 완성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태조대왕 혹은 國祖王(국조왕)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이 왕대에 고구려가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국가로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069) 1세기말∼2세기초 한군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은 이러한 국가적 성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주민집단은 이제 계루부와 그의 통제를 받는 몇몇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제되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椽那部·貫那部·沸流那部·桓那部(연나부,관나부,비류나부,환나부) 등 4개의 那部(나부)는≪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의 5族(족) 가운데 왕실인 桂婁部(계루부)를 제외한 絶奴部·灌奴部·消奴部·順奴部(절노부,관노부,소노부,순노부)와 각각 대응된다.070) 那部(나부)나 奴部(노부)는 동일한 정치적 실체로 계루부와 대비되는 존재이다. 태조대왕 20년과 22년 조나와 주나가 고구려에 통합된 이후 ‘那’(나)라는 명칭은 이들 4개에만 사용되었다. 나부는 자체의 관원을 두었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지니고 대외정복에 참여하였으나, 독자적인 대외운동력은 상실하여 계루부의 통제를 받았다. 각 ‘那部’(나부)는 자치권을 지닌 동시에 계루부의 통제를 받는 ‘하부단위정치체’였고, 계루부는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으로 성장하였지만 나부를 통하여 통치력을 관철하는 한계를 지녔다. 계루부와 4개의 나부는 고구려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로서 이 지역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하는 두 축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의 국가체제는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那部統治體制’(나부통치체제),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의미에서 ‘那部體制社會’(나부체제사회)라 할 수 있다.071)


이처럼 고구려는 기원전 3세기∼2세기초 이래 여러 단계를 거쳐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다. 고구려는 철기보급 이래 나집단의 성장과 통합이라는 긴 연속선상에서 국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구려의 존속기간에 대하여≪三國史記≫고구려본기의 705년설과<高慈墓誌銘>(고자묘지명)의 708년설을 비롯하여 800년설이나 900년설 등이 전하는 것은072) 이러한 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의 성립시기는 관점에 따라 주몽집단의 등장이나 나부체제의 성립뿐 아니라 현도군의 퇴축과 나국연맹체의 형성, 예군남려집단이나 句驪(구려)의 등장, 나집단의 성장 등 여러 시점으로 파악될 수 있다.073) 곧 고구려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독자적인 주민집단 형성 이후 연속적인 역사과정을 밟아왔으므로 계루부왕실 등장 이전도 고구려의 역사로 포괄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800년유국설이나 900년유국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047) 國內城(국내성) 아래층의 토성, 桓仁縣(환인현)의 下古城(하고성), 通化縣(통화현)의 赤柏松古城(적백송고성) 등.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高句麗國內城址的調査與試掘>(≪文物≫1984-1).

蘇長淸,<高句麗早期平原城>(≪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論文集≫, 1985).

邵春華·滿承志·柳嵐,<赤柏松漢城調査>(≪博物館硏究≫1987-3).

田中俊明,<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1, 東京大, 1994).


048) ≪漢書≫권 28, 志 8下, 地理.

049) 權五重,<樂浪郡 運營의 內部的 實態>(≪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78∼80쪽.

050) 고구려 초기 관직 가운데 主簿(주부)·丞(승)은 현도군 때에 토착민이 속리직에 참여한 것의 잔영이라는 견해가 있다(權五重, 위의 책, 82∼83쪽).


051) 기원전 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의 폐지는 토착민의 반발에 따른 결과인데, 汶山郡(문산군)이 설치되었던 冉駹夷(염방이)의 경우 “토착민이 부역을 부담스러워 하자 기원전 67년 郡(군)을 폐지하고 蜀郡(촉군)의 北部都尉(북부도위)에 소속시켜 부역을 감소시켜 주었다”고 한다(權五重, 위의 책, 41쪽).


052) ≪漢書≫권 7, 本紀 7, 昭帝 元鳳 6년 정월.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徐家國,<玄菟郡二遷址考略>(≪社會科學輯刊≫1984-3).


053) 那國(나국)에 비견되는 정치체는 종래 部族國家(부족국가)로 이해되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小國(소국), 城邑國家(성읍국가), 君長社會(군장국가), 초기국가, 노예제소국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展史>(≪韓國文化史大系≫1,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4).

李鍾旭,<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歷史學報≫94·95, 1982).

李基白,<高句麗의 國家形成問題>(≪韓國 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琴京淑,<고구려의 那에 관한 연구>(≪江原史學≫5, 1989).

金基興,<고구려의 국가형성>(≪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 1990).

강맹산,<고구려의 5부>(≪東方學志≫69, 1990).


054) 소노집단이 현도군 설치 이전부터 맹주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주몽집단이 현도군 퇴축을 주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池內宏,<高句麗の開國傳說と史上の事實>,≪東洋學報≫28-2, 1941, 184∼188쪽).


055)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

056) 田中俊明·東潮,≪高句麗の歷史と遺跡≫(東京 ; 中央公論社, 1995), 125∼133쪽.

057)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058) 기원전 2세기 중엽∼1세기초로 편년되는 桓仁 望江樓 積石墓(환인 망강루 적석묘)에서 西岔溝 遺蹟(서차구 유적)과 동일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주민집단의 유입 및 토착사회와의 융합양상을 보여준다(梁志龍·王俊輝, 앞의 글).

059) 주몽집단의 出自(출자)는 문헌상 북부여·부여·동부여 등으로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두만강 하류로 비정하기도 하며, 최근 길림지역의 부여방면으로 보면서 중심부보다는 諸加(제가) 휘하의 한 작은 집단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李龍範,<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및 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1993, 59∼63쪽).


060) 李丙燾,<高句麗 國號考>(앞의 책), 359∼360쪽.


061) 연맹주의 교체시기에 대해서는 동명왕대설, 유리왕대설, 태조왕대설 등이 있다. 또 이와 관련하여 慕本王(모본왕)까지의 解氏王系(해씨왕계)와 태조왕 이후의 高氏王系(고씨왕계)의 관계에 대해 直系(직계)와 傍系(방계)로 파악하는 견해, 해씨왕계는 消奴部王室(소노부왕실)이고 고씨왕계는 桂婁部(계루부)왕실로서 별개의 왕통이라는 견해가 있다.

金基興,<高句麗의 成長과 대외무역>(≪韓國史論≫16, 서울大 國史學科, 1987),32∼37쪽.

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앞의 책), 124쪽.

金龍善,<高句麗 琉璃明王考>(≪歷史學報≫87, 1980), 60∼62쪽.

李鍾泰,<고구려 太祖王系의 등장과 朱蒙國祖意識의 성립>(≪北岳史論≫2, 國民大, 1990).

田美姬,<高句麗初期의 王室交替와 五部>(≪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上, 探求堂, 1992).

金賢淑,<고구려의 解氏王과 高氏王>(≪大丘史學≫47, 1994).

盧泰敦,<高句麗의 初期王系에 대한 一考察>(≪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062)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22년.

063) 余昊奎, 앞의 글, 41∼42쪽.

064) 林起煥,<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體制>(≪慶熙史學≫14, 1987), 44∼50쪽.

065) ≪漢書≫권 99, 列傳 69, 王莽.

金基興, 앞의 글, 32∼37쪽.


066)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33년.

067) 盧泰敦,<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2, 1977), 152∼155쪽.

068)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後漢書≫권 1下, 本紀 1下, 光武帝 建武 8년 12월.


069) 종래 연맹주의 교체시기와 국가체제의 확립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현전하는 자료상 주몽집단이 연맹주로 등장하는 시기와 계루부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체제가 확립되는 시기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慕本王代(모본왕대)까지의 解氏王系(해씨왕계)와 태조왕 이후의 高氏王系(고씨왕계)는 별개의 왕통이 아니라 동일 王系(왕계)내에서 傍系(방계)의 등장으로 파악된다(주 28) 참조).


070) 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5∼7쪽.

071) 한편 고구려가 태조왕대부터 강력한 집권력을 지닌 집권국가로 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光洙,≪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연구≫, 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83, 51∼61쪽).


072) 李弘稙,<高句麗秘記考>(≪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264∼266쪽.

073) 그러나 기원전 277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북한의 최근 연구경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손영종,≪고구려사 Ⅰ≫,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4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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