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t/view.do?levelId=ht_001_0030_0030
* 주제로 본 한국사 > 한국의 건국 신화 읽기 > 2. 고구려의 주몽 신화 읽기
3) 주몽 신화로 본 고구려 건국의 여러 모습
▣ 고구려라는 국명은 무슨 뜻일까
고구려라는 국명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고구려에서는 성[山城, 都城]을 ‘구루(溝婁)’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구려’는 ‘구루’와 통하는 말로 ‘성’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골, 홀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고(高)’는 ‘대(大)’와 같은 뜻으로 ‘크다, 높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대성(大城), 즉 큰 성이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뒤에 고구려는 국명을 ‘고려(高麗)’로 바꾸었는데, 그 시기는 대략 평양 천도 이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주몽 신화에는 주몽이 건국 후, 고구려라는 국명에서 왕실의 성씨를 따서 ‘고씨(高氏)’로 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2대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성씨를 ‘해(解)’라고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고구려 본기에도 4대 민중왕과 5대 모본왕의 이름에는 ‘해(解)’가 들어 있다. 이를 통하여 고구려의 왕실 교체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왕실 교체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고구려 건국 시조의 이름은 주몽(朱蒙)인가, 동명(東明)인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왕호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동명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명왕편』이나 『삼국유사』에서도 왕호는 동명, 이름은 주몽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주몽과 동명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라는 동일 인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국내 자료와는 달리 『삼국지』, 『위서』, 『양서』 등 중국 측 자료에서는 주몽(朱蒙)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은 부여의 시조로 엄격히 구분한다. 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후한 대에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 길험(吉驗) 편과 3세기의 진 대에 씌어진 『삼국지(三國志)』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부여의 시조를 동명왕(東明王)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후의 역사서는 모두 이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시조의 이름에 대해서는 고구려 당대의 금석문인 광개토왕비 등에는 추모(鄒牟)로, 일본 측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추모(鄒牟)⋅주몽(朱蒙) 등으로 나타난다. 또 신라의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도 주몽(朱蒙),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안승(安勝)에게 내린 책 명문에는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추모(鄒牟)와 통하는 것이다. 주몽(朱蒙)과 추모(鄒牟)는 동음이표기(同音異表記)이니 동일한 시조 명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시조는 고구려 국내는 물론이고 주변 국가에까지 주몽(朱蒙)⋅추모(鄒牟)로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 당대에는 동명(東明)과는 다른 존재로, 고구려 시조로서의 주몽(朱蒙)을 내세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동명과 주몽은 별개의 시조 인식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다만 동명(東明)은 부여족의 보편적인 시조 인식 혹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존재로, 고구려의 제천 행사를 동맹제(東盟祭)라고 했던 것이나, 부여족임을 내세우는 백제에서 동명을 시조로 인식하는 측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언제부터 국내 전승 자료에서 동명과 주몽이 동일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
▣ 주몽의 출신지는 동부여인가, 북부여인가
다양한 전승 계통을 갖는 주몽 신화는 주몽의 출신지에 대해서도 북부여(北扶餘)와 동부여(東扶餘) 두 계통이 있다. 5세기 고구려의 금석문 자료인 광개토왕비나 모두루 묘지에서는 주몽의 출신을 북부여라 하였다. 그런데 후자의 사서, 즉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나 『동명왕편』 등에서는 동부여 출신이라는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북부여(北扶餘)에서 나온 것으로 쓰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위서』 등 중국 자료에는 단지 부여로만 나오지 동부여와 북부여 등의 구분은 없다. 여기서 북부여나 동부여는 5세기경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國內城)을 중심으로 한 명칭으로, 북부여는 길림(吉林) 방면의 원래 부여를 가리킨다. 이 부여는 3세기 후반 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받아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北沃沮) 방면으로 옮겨 가게 되는데, 그 후 부여인들이 다시 길림 지역으로 되돌아간 후에도 이 지역에 계속 남아 있던 부류를 동부여라고 했던 것 같다.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동부여는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인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광개토왕 20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정벌되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만강 유역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동부여 출자 설화의 경우에는 주몽의 출신지로서 동부여의 개국 설화, 즉 동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와 금와왕(金蛙王)에 관한 전승도 함께 구성된다. 두 계통의 신화에서 후자가 더 늦게 성립한 것으로 본다면, 주몽의 출신 전승 또한 늦어도 5세기까지는 북부여 전승이 주류를 이루다가, 그 이후 어느 시기엔가 동부여 출자 전승으로 뒤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북부여 출자 전승이 원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북부여 출자 전승에서 동부여 출자 전승으로의 변화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동부여의 존재를 부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동부여계 설화의 등장과 이것이 고구려 건국 신화에 부가되는 과정은 곧 고구려 정치 세력의 변화와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부여의 정통성과 계승성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된 국제적인 배경으로는 4세기 중엽 이후 끊임없이 지속되던 백제와의 쟁패를 들 수 있다. 즉 부여족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백제가 경쟁했던 것인데, 백제가 시조로서 동명왕을 추숭한 것이나 성왕 때 사비로 천도하면서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로 칭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 고구려의 왕실 교체
『후한서』 권 85 고구려전에는 “5부가 있는데,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이며, 본래 소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점차 미약해져서 그 뒤에 계루부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본기」 송양((松讓)의 ‘양(壤)’은 나(那)⋅노(奴)와 그 뜻이 통하므로, 송양(松讓)은 송나(松那)⋅송노(松奴)라는 뜻이 된다. 이는 소노부의 ‘소노(消奴)’와 음이 통하게 되어 양자를 동일한 실체로 보기도 한다. 송양이 주몽 이전의 토착 세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송양이 주몽에게 항복한 것은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교체된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 유화와 주몽에 대한 신앙 의례
유화는 주몽과 더불어 고구려 사회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가 태양신(천신)이라면 하백의 딸 유화는 지모 신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는 「구삼국사」의 주몽 신화에서 부여를 탈출한 주몽에게 새를 보내어 곡식의 종자를 전해 주는 대목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편 『주서』 고려전에는 고구려 후기까지도 유화는 부여 신(扶餘神)으로서 주몽인 고등 신(高登神)과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신묘(神廟)에 모셔지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 주몽 신화의 여러 유형과 전승 자료
본래 주몽 신화는 부여족이 공유하던 동명 신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여의 동명 신화는 후한 왕충(王充)이 1세기 후반 무렵에 저술한 『논형(論衡)』 길험 편에 기록될 정도로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는데, 부여의 건국 시기를 고려하면 동명 설화는 기원 이전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동명 설화는 부여족의 이동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전파되어 고구려의 주몽 설화나 백제의 건국 설화에 영향을 주었다.
현재 고구려의 건국 신화로 알려진 주몽(朱蒙) 신화는 여러 전승 자료가 있다. 가장 기록 시기가 올라가는 것은 5세기 대에 고구려인에 의해 직접 남겨진 금석문 기록이다. 장수왕 2년(414)에 건립된 ’광개토왕비’에 일부 모습을 전하며, 역시 장수왕 대에 만들어진 ’모두루 묘지’에도 건국 신화의 모습이 전한다. 이들 기록의 주몽 신화가 당시의 건국 신화 그대로는 아니지만 일부 핵심 줄거리를 전하고 있다.
오히려 전체적인 면모는 6세기 중엽에 편찬된 중국 사서인 『위서(魏書)』 고구려전에 전하는 주몽 신화에서 볼 수 있으며, 이후 편찬된 중국 사서의 고구려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서(魏書)』의 건국 설화는 장수왕 23년경 고구려를 방문한 북위(北魏) 사신 이오(李傲)의 전문(傳聞)으로 추정된다. 즉 주몽 설화는 늦어도 5세기 초에는 성립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뒤늦은 시기에 정리된 사서이지만 가장 구체적이고 풍부한 설화의 내용을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나 『삼국유사』, 이규보의 『동명왕편』 등 국내 사서에 보이는 주몽 신화이다. 특히 『동명왕편』에서는 『삼국사기』 이전에 편찬된 「구삼국사」에 의거하여 주몽 신화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동명왕 본기와 『동명왕편』의 내용이 큰 줄거리에서는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기술에서는 제법 차이가 나는데, 『동명왕편』의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고 설화적인 성격이 풍부하다. 그래서 『동명왕편』의 전승을 보다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주몽 신화 전승 자료는 대략 세 계통으로 볼 수 있으며, 각 전승은 그 성격이나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동명이나 주몽의 부계나 모계에 대한 인식에서 볼 때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부여의 동명 신화에서는 모계가 시비(侍婢)이지만 부계를 천상(天上)의 기(氣)로 기술하고 있다. 신화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짐작된다. 둘째, 『위서(魏書)』 고구려전에 전하는 주몽 신화로, 모는 하백녀(河伯女)이며 일광(日光)의 감응에 의하여 임신하고 주몽이 출생하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때 주몽은 ‘일자(日子)’로 자칭한다. 그리고 고구려 당대의 기록인 광개토왕비나 모두루 묘지의 주몽 신화에서는 아버지인 천제(天帝)⋅일월(日月)과 어머니인 하백녀(河伯)女)와의 결합으로 주몽이 탄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비록 내용이 지나치게 간략하지만 그 요체는 위 『위서』의 내용과 통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셋째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나 『동명왕편』 등에 전하는 주몽 신화로, 천제(天帝)와 하백(河伯)을 대신하여 인격 신의 모습을 지닌 해모수와 유화가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고구려 본기 등에 전하는 주몽 신화의 형태가 가장 늦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구려 본기나 『동명왕편』의 주몽 신화에서 주몽의 탄생 과정을 보면, 분명히 해모수가 등장함에도 주몽의 탄생은 유화가 일광에 감응한 결과로 씌어져 있다. 그리고 후일 주몽 스스로도 천제지자(天帝之子)라 칭하고 있다. 이처럼 일광에 감응하는 이야기 구조는 『위서』 고구려전의 신화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본기의 해모수 관련 설화 역시 『위서』에 보이는 주몽 설화의 기본 골격을 바탕으로 후일에 덧붙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해모수 설화와도 구분되는 동부여 왕 해부루(解夫婁)와 금와왕(金蛙王) 설화가 다시 추가되면서 현재 전하는 주몽 신화로 완성된 것이다.
▣ 건국 신화와 동맹제
건국 신화는 고구려 왕의 통치의 정당성 및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다. 즉 천신(天神)을 부계(父系)로 하고 수신(水神)을 모계(母系)로 하는 주몽의 신성한 혈통이 곧 고구려 왕권의 이념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의 이념성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제천 의례 공간이다. 고구려에서는 제천 의례를 동맹이라 이름하였다.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사료 2-3-01〕 『삼국지』 고구려전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나라에 큰 대회[國中大會]를 열어 이름을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 나라 동쪽에 큰 동굴이 있어 이름을 수혈(隧穴)이라고 한다. 10월의 국중 대회 때 수신(隧神)을 맞이하고 나라 동쪽의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에 모셔 둔다.”
이 제천 행사의 대상이 막연히 ‘하늘[天]’은 아니었을 것이며, 구체적인 의례 대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 후보로는 주몽의 아버지인 천제(혹은 해모수)와 시조 주몽을 상정할 수 있다. 뒤이어 나오는 수신(隧神)에 대한 제사도 제천 행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수신(隧神)은 시조의 어머니인 유화를 말하며 평소에는 국내성의 동쪽에 있는 대혈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유화가 유폐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수신제는 수신을 수혈에서 모시고 나와 국내성 동쪽의 압록강으로 옮겨 물 위[水上]에 설치한 신좌에 두고 제사하는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는 유폐되어 있던 유화가 일광(日光)에 의하여 주몽을 잉태하였다는 건국 신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시조 주몽이 천신과 수신의 후손이라는 신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동맹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동맹제는 건국 신화를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제의(祭儀)가 현실에서는 어떠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을까. 우선 동맹제가 ‘국중 대회(國中大會)’라는 점에서 전 국가적인 행사로서, 아마도 고구려 국내 대부분의 지배층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 체제가 확립되면서 계루부 왕실의 시조가 고구려 전체의 시조로 인정되면서 국가적 제의로 격상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제천 의례에는 전체 지배층의 참가가 당연한 의무였을 것이다. 흉노와 선비의 경우에도 이러한 면이 잘 나타나는데, 흉노의 경우 제의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반역의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선비(鮮卑) 탁발부(拓拔部)에서는 제의에 참가하지 않은 대인을 처형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동맹제에서는 시조 주몽이 천신과 수신의 후손으로서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하였고, 이를 국왕이 직접 주재하였다. 이는 시조의 신성성(神聖性)이 제의를 주재하는 국왕에게 현실화(現在化)됨으로써 국왕도 신성한 존재로 격상되는 것이었으며, 국왕은 이를 통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조 신화를 재현하는 제의를 통해 시조의 신성한 권력은 현재의 왕에 의해 구현되었기에, 국왕 주재하에 열리는 회의는 시조인 천신이 주재하는 것이었고, 여기에서의 결정 사항은 국왕의 결정인 동시에 하늘의 결정이라는 인식이 건국 신화가 추구하는 목적이었다.
오녀산성 전경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오녀산성과 하고 성자촌 전경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상고성자 돌무지무덤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오녀산성에서 본 고려 묘자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고려묘자 돌무지무덤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국내성 성벽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보수 전 국내성 성벽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환도산성 전경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환도산성 남벽과 배수구
출처: 동북아 역사 재단 편, 『고구려 문명 기행』, 2007.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고구려 > 건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의 어원과 고구려인의 기원 - 민족문화대백과 (2) | 2024.10.21 |
---|---|
고구려의 건국 연대 - 한국사DB (1) | 2024.10.19 |
(2) 나부체제의 성립 - 우리역사넷 (0) | 2019.12.29 |
(1) 나집단의 성장 - 우리역사넷 (0) | 2019.12.29 |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 - 우리역사넷 (0) | 2019.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