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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어원과 고구려인의 기원
1. 고구려의 어원
국호 ‘고구려’의 어원은 ‘구려(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몽골고원 오르혼 강 기슭에 서있는 돌궐(突闕) 제2제국의 빌게가한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기린 2개의 고돌궐비(古突闕碑)에서 고구려를 배크리(Bokli)라 기술하였다. 돌궐어에서 B음과 M음이 상호전환 될 수 있으므로 배크리는 매크리(Mokli)이며, 그 밖에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돈황문서(敦煌文書) P.1283 등에서 고려를 ‘무구리(畝久理)’ ‘Mug-lig’라 하였다. 이는 모두 맥구려(貊句麗) 즉 ‘맥족(貊族)의 구려’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곧 고구려에서 ‘구려’가 어간이고, ‘고’는 관형사임을 말해준다. 고구려어에서 성(城)을 ‘구루(溝漊)’, ‘홀(忽: khol)’이라 하였다. 이는 읍(邑), 동(洞), 곡(谷)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고구려’는 ‘구려’에다가 ‘크다’, ‘높다’는 뜻의 ‘高’=‘大’를 덭붙인 말로서, ‘큰 고을’ ‘높은 성’의 뜻을 지닌 말이다.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상에 등장한 것은 현토군(玄菟郡) 설치 때(B.C. 107) 그 속현(屬縣)의 하나로 고구려현(高句麗縣)이 두어지면서였다. 즉 토착민들이 ‘큰 고을’이라고 부르던 읍락에 현을 설치하고, 이를 고구려현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뒤 서기전 75년 현토군이 퇴축된 이후 이 읍락을 중심으로 고구려 연맹체가 형성되었고, 이후 국호로 사용되었다. 5세기 중엽 이후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한자의 뜻을 살려 고구려를 줄인 말인 ‘고려(高麗)’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승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 퇴축 : 움츠리고 물러남
2. 고구려인의 기원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의 종족 계통을 중국 측 사서에서 맥족이라 기술하였다. 맥족은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부터 등장하는데, 그들의 거주지역이 북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부터 요동(遼東) 지역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압록강 중류 지역의 맥족은 먼저 문헌 상에 등장하였던 북중국의 맥족이 한족(漢族)에 밀려 동으로 이동한 이들이라는 설이 기원후 2세기에 제기된 바 있고 근대에도 같은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선진문헌의 맥족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한다기보다 한족 거주지의 북쪽에 사는 농경문화가 덜 발달된 족속들에 대한 범칭(汎稱)이다. 맥족 이동설은 아무런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주민이동설의 또 하나의 예는 근래 중국학계의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고이족설이다. 즉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의 에서 서기전 12세기 말 성왕(成王)이 낙양에서 사방의 제후와 종족들의 조회를 받았는데 그 중 고이족(高夷族)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기사의 ‘고이(高夷)’에 대해 4세기 초 공조(孔晁)가 주(注)를 달아 고이가 곧 고구려다고 하였다. 이런 공조의 주를 근거로 삼아, 고이족이 산동반도를 거쳐 요동반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고구려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이족이 고구려였다고 한 것은 공조의 주가 유일하고, 그것은 낙양에서 조회가 있었다는 주(周) 성왕(成王) 대로부터 무려 1,400여 년이 흐른 뒤에 기술된 것이다. 고이가 고구려를 지칭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고이족 이동설도 그러하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방안은 이 지역에 널리 분포해 있는 적석총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소박한 형태의 무기단 적석총(積石塚)에서부터 거대한 방단(方壇)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양식의 적석총이 존재한다. 이들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 지역 링위엔/능원(凌原)의 홍산 문화 유적인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적석총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시간적 · 공간적으로 압록강 적석총 유적과 너무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우하량 유적은 서기전 3000∼2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적석총은 형태와 시간적 측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요동 반도 남단의 청동기 시대 무덤인 적석총유적(강상묘, 루상묘 등)이다. 압록강 하류 콴뎬/관전현 · 펑청/봉성현 등지의 적석총을 매개로 양 지역의 유적이 서로 연결되는 면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구려를 세운 이들로서 한인들에 의해 맥족이라고 호칭되었던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은 외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토착해서 살아왔던 족속이다. 청동기 문화단계에서 요동 방면으로부터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어 서기전 3세기 대에 연(燕)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한 이후 연의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서서히 발전을 도모해나갔다. 이들은 서기전 1세기 중반 고구려연맹체를 형성한 이후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국의 성장과 함께 그 세력 하에 포괄되어 들어온 예맥계의 옥저(沃沮) · 동예(東濊) · 부여(夫餘) · 조선(朝鮮) 등의 여러 종족들이 원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상호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한인들도 융합되어 들어왔으며, 남녁의 한(韓)족의 일부도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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