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41052.html


‘상상의 나라’ 기자조선 둘러싼 한-중의 동상이몽

등록 :2020-04-19 12:35 수정 :2020-04-19 13:50


[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 (22) 상상의 나라, 기자조선


려 거쳐 중국과 조선시대 사대주의가 만들어놓은 상상의 ‘기자동래설’

요서지역 다링허에서 ‘기씨 성의 제후’ 청동기 나왔다지만 근거는 태부족


랴오시 일대에서 3천년 전에 살던 전차를 탄 유목전사. 랴오닝성박물관. 강인욱 제공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기자조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별로 밝혀진 것이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중국 고대 상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기자(箕子)가 주나라를 피해서 동쪽으로 오자 단군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하여서 기자조선이 1천년 넘게 존속되었다고 한다. 기자동래설은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최근에 중국에서는 이 기자조선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 근거로 중국에서 한반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요서지역의 다링허(大凌河)에서 기자를 연상하게 하는 ‘기씨 성의 제후’가 쓰던 청동기를 들고 있다. 과연 기자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라 실재했을까. 기자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 고대사학계의 해묵은 논쟁을 유라시아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1913년 일본이 간행한 도록에 실린 평양의 기자묘.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기자는 정말 조선으로 왔을까?


기자라는 이름은 중국 고대의 다른 위인들과 같이 ‘기족 출신의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실제 기자는 상나라 왕족 출신으로 성은 ‘자’(子)이다. 기자의 원래 이름은 서여 또는 수유인데, ‘기’(箕)라는 이름은 씨족이 통치한 지역 명칭에서 나왔다. 실제로 당시에 ‘기’라는 지역은 현재의 산시성, 베이징, 산둥반도 등에 있었다. 정작 기자는 상나라가 멸망할 때 충절을 지킨 3인(기자, 비간, 미자) 중 한 명으로만 알려졌을 뿐,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사실 기자가 우리에게 알려진 이유는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자동래설’ 덕분이다. 그런데 기자동래설은 기자가 죽은 뒤 1천년이 지난 한나라 때에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기자가 왕이 되는 과정도 각 책마다 서로 다르게 나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기자가 무리를 이끌고 주나라를 도망쳐서 나라를 세웠다고도 하고, 또 다른 기록에는 주나라가 기자를 책봉했다고도 한다. 후대에 윤색이 더해진 결과이다. 분명한 점은 이 이야기가 한나라 때에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한나라와 고조선의 전쟁이 있다.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는 조선을 정벌하는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정벌의 명분으로 원래 조선은 자신들이 사람을 보내 세운 나라였다는 이유를 들었던 것이다.


이후 기자의 동래설은 고려를 거쳐서 소중화를 자처하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실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불교 대신에 조선의 국가이념을 뒷받침해주는 일종의 만들어진 고대역사의 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근대적인 역사학이 등장하면서 기자조선은 신화로 그냥 남게 되었다.


베이둥촌 유적. 가운데에 움푹 파인 돌구덩이가 있다. 강인욱 제공


다링허에서 발견된 중국의 청동기


그러다 1970년대부터 베이징과 만주 사이의 길목인 다링허 유역에서 기자조선을 증거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등장했다. 그 출발점은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73년 랴오닝성의 카쭤(喀左) 베이둥촌(北洞村) 뒷산이었다. 현지의 농민들이 돌산을 갈다가 소중하게 차곡차곡 청동기를 쌓아놓은 구덩이를 발견했다. 하-상-주로 이어지는 고대 중국의 왕조에서 청동 제사그릇은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왕은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글귀가 적힌 청동그릇을 하사해서 충성심을 자극하고 각 제후들은 그 제사그릇을 대를 이어 전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고대 상나라와 주나라의 귀족들이 쓰던 그 소중한 제사그릇이 황량한 요서지역의 돌산에서 무더기로 발견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다링허 일대에서는 베이둥촌 이외에도 비슷한 중국 청동기가 포함된 유적이 10개 가까이 더 발견되었다. 이 중국의 청동기가 원래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청동그릇의 표면에 새겨진 글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기족의 제후’이라는 뜻인 ‘기후’가 새겨진 네발솥도 있었다. 기자가 살았던 시대와 비슷하고 기족이라는 글자까지 나왔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자가 동쪽으로 온 증거라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다링허 일대의 청동기를 기자와 곧바로 연결시키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기씨라고 해서 무조건 상나라 왕족 출신인 기자와 연결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다링허에서 멀지 않은 산둥과 베이징 일대에도 성이 강(姜)씨인 또 다른 기족의 제후가 있었다. 경주에 경주 최씨, 경주 김씨가 따로 있듯 ‘기’라는 이름을 한 다른 씨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기자조선을 증명할 성터, 고분, 궁궐 같은 유물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기자의 증거라고 볼 이른바 ‘스모킹 건’은 없는 셈이다.


베이둥촌 유적을 조사하는 장면을 재현한 모습. 랴오닝성박물관. 강인욱 제공


전차를 타고 내려온 유목민들


다링허의 미스터리한 기족 청동기의 비밀을 푸는 단서는 그들이 처한 환경적인 요건에 있다. 이 지역은 북쪽으로는 몽골초원, 서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문명의 교차지대이다. 이 청동기들을 사용하던 기원전 13~12세기엔 기온이 떨어진 탓에 초원지역이 남쪽으로 널리 확대되었다. 그에 발맞추어 몽골 초원에서 전차를 타고 다니던 유라시아의 유목민들이 중국의 만리장성 일대로 남하했다. 당시 동쪽 다링허 유역에서 서쪽 간쑤회랑까지 아우른 이들은 중국의 청동기를 받아들여 유목민의 전차, 그리고 초원의 무기를 함께 사용했고, 상과 주나라는 반대로 유목민의 발달된 무기와 전차를 받아들였다.


전차와 무기가 중국에 영향을 주었듯이 유목민들은 화려한 중국의 제사 의식과 제사 용기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중국에서 기원한 세발솥(鼎) 토기는 멀리 바이칼 유역까지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링허의 중국 청동기들도 대부분 다리가 세 개 달린 솥 종류이다. 유목민들이 솥을 선호하는 이유는 사방을 이동하는 그들이 제사 때에 쓰는, 걸고 쓸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릇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링허에서 발견된 청동그릇들은 중국에서 온 것도 있지만 현지의 청동기술자가 중국 것을 흉내내서 만들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무늬를 덧붙인 것도 있다. 심지어 화얼러우(花爾樓)라는 유적에서는 고기를 얹는 쟁반(또는 도마)도 발견되는데, 중국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고기를 담는 쟁반은 유목민들의 쿠르간(무덤)에서는 자주 발견된다. 또한 다링허 지역은 이 중국의 청동그릇을 사용하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거울과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초기 고조선의 문화가 발달한다. 이렇듯 다링허 지역은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며 변화한 지역이다. 단편적인 자료 몇 개로 기자조선인가 아닌가라는 흑백논리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유라시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던 이 지역의 역동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링허 청동기가 나온 위치.


상상의 나라에 숨겨진 진실


사실 기자조선 같은 상상의 나라는 세계 역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완전한 허구에 기초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가지를 쳐서 과장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중세 서양에서는 동방의 어딘가에 사제 요한(프레스터 존)이 만든 나라가 있었고, 그들이 십자군을 도와서 이슬람인들을 몰아낼 것으로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대항해의 시대가 본격화한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상의 산물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들이 생각한 상상의 왕국은 바로 5세기께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라시아로 퍼져나간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인들이 와전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에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며 탈아입구의 기치를 내세우며 일본인들은 황인종이 아니라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도호쿠 지방에는 ‘예수의 무덤’이 버젓이 있을 정도이다. 가짜인 줄 알면서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그를 받들던 조선시대의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각국의 여러 상상의 국가 중 하나로 남을 법한 기자조선이 다시 등장하게 된 데에는 중국 학계의 역할이 컸다. 중국은 1990년대 이후에는 다시 기자조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 핵심적인 증거로 다링허 유역의 중국 청동기를 들었다. 이렇게 중국이 태도를 바꾸게 된 데에는 중국의 중화사관이 연결되어 있다. 기자조선을 인정하면 실질적인 한국사는 중국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기자에 이어 등장한 위만조선도 연에서 망명한 중국인이 세운 나라이며 그다음에는 한사군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또한 한사군을 몰아낸 고구려의 경우 태양신, 가한(카간)신과 함께 기자신을 섬겼으니 고구려도 기자조선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까지 이으면 한국 역사의 대부분은 모두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논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의 실증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자조선의 궁궐, 무덤 등 객관적인 고고학적 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그 나라의 존재를 인정할 근거는 아직 없다. 중국과 조선시대의 사대주의가 만들어놓은 상상의 나라 기자조선에 대한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이해가 없이 ‘기족의 제후’라는 글자만으로 한국사에 대한 ‘확증편향'을 잇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저해할 뿐이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베이둥촌에서 발굴된 세발솥. 랴오닝성박물관. 강인욱 제공


베이둥촌 출토 기족 제후라는 명문이 새겨진 다리솥. 출처 중국잡지 <考古>


베이징 근처의 전차부대가 탄 전차 부속 중간에 유목민의 기호가 있다. 베이징서우두박물관. 강인욱 제공


베이둥촌 청동기 발굴 장면. 출처 랴오닝성 박물관


화얼러우에서 발견된 청동제 고기 얹는 쟁반. 강인욱 제공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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