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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國內城)
중문 (国内城)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0:00 개략적 설명 1:00 축조시기와 역할 1:50 국내성 북벽 2:05 성벽 발굴, 복원 상황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
개설
국내성은 고구려 두 번째 도성으로 서기 1세기 중후반부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400여 년간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평양 천도 이후에도 국내성은 별도(別都)로서 도성인 평양성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 국내성지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고구려 건국 이전설, 3세기 중반설, 4세기 전반설 등 여러 견해가 있다.
건립 경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는 유리왕 22년[A.D. 3]에 졸본(卒本)에서 국내로 천도했다고 한다. 반면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는 공손씨(公孫氏)의 침공으로 도성이 파괴되자 산상왕(山上王)이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更作新國]’고 한다. 이에 국내 및 중국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근거로 국내 천도 시기를 유리왕(琉璃王)대로 보는 반면, 일본 학자들은 산상왕 대인 2세기 말경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첫 번째 도성에서 이미 평지 거점과 군사 방어성으로 이루어진 도성 체계를 구축했다. 산상왕이 축조한 성곽은 국내 도성 전체가 아니라, 군사 방어성인 환도성을 가리킨다. 산상왕의 도성 건설은 공손씨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 지역의 평상시 거점에서 새로운 군사 방어성으로 거처를 옮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초기 기사는 윤색된 부분이 많으므로 유리왕 대 천도설을 그대로 신빙하기도 어렵다. 제반 상황을 종합하면 국내 천도는 국가 체제를 확립하던 1세기 중후반에 단행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국내 천도 초기 도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에 342년(고국원왕 12)에 국내성을 축조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4세기 전반에 현재의 국내성지를 초축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국내성지에서 320년대에 제작된 새털구름 무늬[권운문(卷雲文)] 와당이 다수 출토되는 만큼 4세기 전반에 초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로 3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현재의 국내성지와 산성자 산성[환도 산성]으로 이루어진 평지성과 산성의 도성 체계를 확립했다고 파악된다.
이때 궁궐, 관아, 귀족의 저택 등 주요 시설은 국내성지 내부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각지의 유력 세력이 중앙 귀족으로 전환하면서 도성의 인구도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거주 구역이 국내성 외곽으로 확장되고, 고분 조영도 급격히 늘어났다. 대규모 인구를 갖춘 도시로 발전한 것인데, 국내성지 외곽의 건물지나 주변의 무수한 돌무지무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위치
국내성은 중국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국내성지로 비정되는데, 압록강 중류 우안의 통구 분지(通溝盆地) 서부에 위치해 있다. 통구 분지는 동서 길이 10㎞, 남북 너비 2∼4㎞로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가장 넓은 분지인데, 북쪽으로는 백두산에서 뻗어나온 노령 산맥(老嶺山脈)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성의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고, 서쪽에는 노령 산맥에서 발원한 통구하(通溝河)가 남류하여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또한 성의 남쪽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동에서 서로 성벽 외곽을 따라 흘러 통구하로 유입된다. 이러한 하천과 개울은 천연 해자(垓子)의 역할을 한다. 남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滿浦市)와 마주보고 있다.
형태
국내성지는 남쪽의 압록강과 서쪽의 통구하가 천연 해자를 이루며, 북쪽의 우산(禹山)이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 평면은 네모꼴로서 둘레는 2,686m에 달하며, 잘 다듬은 쐐기형 돌로 성벽을 축조했다.
1970년대 발굴 자료에 따르면, 고구려 시기에 석축 성벽을 한 차례 개축한 사실과 더불어 석성 아래에서 토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발굴자들은 이를 한(漢)현도군의 군현성으로 파악했는데, 2000년대 발굴에서는 토성을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1910년대만 하더라도 치 42기를 비롯하여 모서리에 있는 문루[각루(角樓)], 성가퀴 등이 잘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유실되었다. 다만 1970년대 조사시에 치 14기를 확인했고, 2000년대에 동북과 서남각루를 발굴했다.
성문의 수는 조사 시점마다 조금씩 다르게 파악되었는데, 2000년대에 모두 9개를 확인했다. 남쪽 동문과 북쪽 서문은 본래 옹성이었지만, 현재는 모두 유실되었다. 최근 남쪽 서문의 어긋문식 옹성을 재확인했다. 성 내부에서는 현재까지 30여 곳 가까운 건물 터를 발견했는데, 4세기에 유행한 권운문 와당이 거의 전역에서 확인된다. 특히 옛 집안시 청사를 중심으로 좌우 일직선상에서 초석·담장·기와편 등이 많이 발견되어 왕궁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현황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성벽이 잘 남아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개축과 시가지 개발로 많이 파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국내성은 고구려 두 번째 도성으로서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별도(別都)로서 번영을 누렸다. 발해 시대에도 서경 압록부 산하 환주(桓州)로서 지방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내성지 안팎에서 발견된 많은 건물지와 1만여 기가 넘는 무덤은 국내성의 이러한 위상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국내성으로 비정되는 국내성지 일대는 고구려 역사와 문화, 나아가 발해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池內宏, 『通溝』 上(日滿文化協會, 1938)
三品彰英, 「高句麗王都考」(『朝鮮學報』 1, 1951)
集安縣文物保管所, 「集安高句麗國內城址的調査與試掘」(『文物』 1984-1, 1984)
魏存成,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 1985-2, 1985)
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국사관 논총』 48, 1993)
노태돈,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와 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國內城』(文物出版社, 2004)
여호규, 「고구려 국내천도의 시기와 배경」(『한국 고대사 연구』 38, 2005)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인 국내성이다.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인 국내성이다.
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국내성 성벽 모습이다.
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국내성 성벽 모습이다.
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국내성 성벽 모습이다.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인 국내성 남벽 구간이다.
국내성 서벽 남쪽과 치이다.
국내성 서벽의 배수구이다.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인 국내성 북벽이다.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인 국내성 북벽 안쪽이다.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국내성 터로 비정되는 성인 국내성 북벽과 노출된 치이다.
국내성 왕궁지로 추정되는 통구성 동문 바깥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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