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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성(阿達城) 
 
 
소나가 아달성에서 변방을 방어하다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열전 제7 > 소나(素那) > 소나가 아달성에서 변방을 방어하다
 
소나(素那)의 용맹하고 뛰어남은 아버지를 닮았다. 백제가 멸망한 후, 한주(漢州) 도독(都督)註 026 도유공(都儒公)註 027은 〔문무〕대왕에게 청하여 소나를 아달성(阿達城)註 028으로 옮겨 북쪽 변방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註) 028  아달성(阿達城) :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에 보이는 한주(漢主)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 중 안협현(安峽縣)의 옛 지명인 아진압현(阿珍押縣)으로 이해된다.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7년(667) 10월조에 보이는 아진함성(阿珍含城)과도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지금의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북한 강원도 철원군)에 비정된다(이병도/李丙燾, 444쪽; 정구복 외, 801~802쪽).
 
〈참고문헌〉
이병도(李丙燾), 1983, 『역주 삼국사기(譯註 三國史記) (하/下)』, 을유문화사(乙酉文化社)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토산군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잡지 제4 >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 토산군
 
토산군(兎山郡)註 187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註 188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89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3개이다.

 

안협현(安峽縣)註 19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아진압현(阿珍註 191押縣)註 192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93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삭읍현(朔邑縣)註 19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소읍두현(所邑豆縣)註 195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96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삭녕현(朔寧縣)註 197이다.

 

이천현(伊川縣)註 198은 본래 고구려 이진매현(伊珍買縣)註 199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200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註) 192  아진압현(阿珍押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안협현(安峽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으로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아진압을 궁악(窮嶽)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아진압의 ‘압(押)’은 상고음이 ‘kap’, 중고음은 ‘ap’으로 ‘악(嶽)’을 뜻한다(도수희, 2005, 501쪽). 본서의 신라본기6 문무왕 7년 10월조와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 9월조에는 아진함성(阿珍含城)과 아달성(阿達城)이 나오는데, 모두 아진압현과 동일한 지명으로 파악된다(정구복 외, 1997c, 212쪽 및 237쪽). 그에 따르면 문무왕 7년(667년) 10월 2일에 고구려 평양성 북쪽 200리에 도착한 당의 이적이 신라의 이동혜촌(爾同兮村) 촌주 강심(江深)을 뽑아 거란 기병 80인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경유하여 한성에 도착한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 군기(軍期)를 독려하였다고 한다. 아진함성이 평양-한성 교통로의 중요 경유지임을 잘 보여준다. 또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문무왕 15년(675년) 9월 29일에는 말갈이 아달성을 침입하여 약탈하자, 성주인 소나(素那)가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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