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답서: 신라와 당이 고구려 원정에 나서다 ( 671년 07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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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乾封)註 001 2년(667)에 이르러서는 대총관註 002 영국공(英國公)註 003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한성주(漢城州)註 004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국경 가까이에 모이게 하였습니다.註 005 신라 병마가 홀로 쳐들어가서는 안 되었으므로 먼저 간자(間者)를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註 006 간자가 돌아와서 모두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註 007을 쳐서註 008 길을 뚫고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이 보낸 강심(江深)註 009이 와서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마는 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註 010 행렬이 수곡성(水谷城)註 011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마도 마침내 곧 빠져나왔습니다.”註 012
주
註) 007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중성산(重城山)에 위치한 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중성산은 해발 147m로 정상부의 8~9부 능선에 칠중성이 위치하고 있다. 칠중성의 전체 둘레는 600m이고, 평면 형태는 남북 198m, 동서 168m로 남북이 긴 장방형 형태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38쪽; 경기도박물관, 2001, 275쪽;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253쪽). 이 일대는 감악산(紺岳山)에서 파평산(坡平山)으로 이어지는 감악산지에서 북쪽의 임진강을 향하여 발달한 북사면에 해당되는 곳이다. 그리고 칠중성은 감악산에서 북쪽의 임진강 방향으로 뻗어 있는 지맥 말단부의 급경사면 위에 축조되어 있다(이준선, 2005, 151쪽; 김덕원, 2019, 336쪽). 칠중성이 위치한 적성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임진강 유역을 방어하는 핵심지역이다(서영일, 2017, 203~204쪽). 칠중성과 관련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온조왕 18년(기원전 1)에 백제가 북쪽 변경을 침입한 말갈과 칠중하(七重河)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4세기대까지는 적성지역이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가,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과 임진강유역에서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7세기 초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킨 것을 계기로 임진강과 한탄강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칠중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다가 667년 무렵에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차지하였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가 다시 영유하였다. 나당전쟁 시기에 이르러 신라와 당 사이의 주 전선이 임진강 일대가 되면서 칠중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김덕원, 2019, 366쪽).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4, 『경기도 파주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경기도박물관, 2001, 『임진강 vol.2』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파주시, 2001,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 보고서』
이준선, 2005, 「칠중성과 고랑포의 역사지리적 고찰」, 『애산학보』 31
서영일, 2017, 「삼국시대 임진강 유역 관방체계와 덕진산성」, 『백제문화』 56
김덕원, 2019, 「칠중성의 영유권 변천과 전략적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33
註) 008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중(中)조에는 662년 정월에 김유신이 신라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했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김유신은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강을 건너 고구려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칠중하 남안 즉 칠중성이 위치한 곳은 신라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67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서 길을 뚫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가 어느 시점에 칠중성을 장악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이 거세게 지속되던 663년을 전후하여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는 667년까지 칠중성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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