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군사가 석현성을 빼앗자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 죽다 ( 675년 09월(음)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7 > 문무왕(文武王) > 당나라 군사가 석현성을 빼앗자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 죽다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力戰, 死之.
당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註 001을 에워싸서 빼앗았다. 현령(縣令) 선백(仙伯)註 002과 실모(悉毛)註 003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註 004
註 001 석현성(石峴城): 문무왕 15년(675) 9월 매소성전투 이후 당군은 아달성·적목성과 함께 석현성을 공격하는데 그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 권18에서 황해도 곡산(谷山) 일대로 보았고, 경기 개풍군 청석동(靑石洞)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86, 48쪽). 그런데 당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선이 임진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석현성을 당의 세력권 하에 있던 임진강 이북이나 황해도로 비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본서 권제25 백제본기제3 진사왕 8년 7월조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40,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북변을 공격해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전한다. 이후 한강 이북의 여러 지역이 고구려에 점령당하였으며, 10월에는 관미성(關彌城)까지 함락당하였다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25 백제본기제3 아신왕 2년 8월조에는 백제가 군사 1만 명을 동원해 고구려가 점령한 석현 등 5개 성을 회복하고자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군량이 지속적으로 보급되지 못해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석현성이 관미성(關彌城)과 상호 보조적인 관계를 가지며,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위치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481~482쪽). 석현성은 서쪽으로 오두산성, 북쪽으로 칠중성·매소성, 남쪽으로 북한산성을 연결할 수 있는 양주(揚州)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상훈, 2012, 217쪽). 현재 양주시 장흥면에는 석현리(石峴里)와 석현천(石峴川)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86,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고구려멸망후 유민의 반란 및 당과 신라의 관계(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만선사연구(滿鮮史硏究) -상세편(上世篇) 제2책(第二冊)-』, 요사카와홍문관(吉川弘文館)
註 002 선백(仙伯): 선백은 문무왕 15년(675) 9월에 석현성전투(石峴城戰鬪)에서 현령(縣令)으로서 실모(悉毛)와 함께 당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외에 선백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3 실모(悉毛): 실모는 675년 9월에 석현성전투(石峴城戰鬪)에서 현령(縣令)으로서 선백(仙伯)과 함께 당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외에 실모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4 현령(縣令)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 죽임을 당하였다: 문무왕 15년(675) 9월 석현성전투에서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가 전사하였다. 석현성에서 현령 2명이 전사한 것은 성(城)을 중심으로 하여 복수의 현이 조직화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縣)은 관내 촌의 인적 자원을 동원하고 이를 전투와 생산에 투입하는 기초 단위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6세기 말 이래 삼국간 각축전이 치열해지면서 그 전장이 되었거나 병력 동원이 집중된 변경 지역의 촌락은 생산 기반이 붕괴되었다.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671)에 신라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는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였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익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모두 써버려서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다소 과정이 섞여 있지만 장기간 전쟁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접경 지역의 피폐와 촌민의 분화 양상은 격심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접경 지역으로 대규모 사민(徙民)보다는 전쟁 과정에서 부침을 겪은 촌락들을 새로운 행정구역인 현으로 묶어 재편하고 방어시설인 성을 중심으로 집주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할 수 있고 농경 노동의 집중도도 높일 수 있었다(김창석, 2007, 「신라 현재(縣制)의 성립과 기능」, 『한국고대사연구』 48, 142~143쪽).
* 집주 : 한곳으로 모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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