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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목성(赤木城)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자 탈기가 맞서 싸우다 죽다 ( 675년 09월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7 > 문무왕(文武王) >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자 탈기가 맞서 싸우다 죽다
 
말갈이 또한 적목성(赤木城)註 001을 에워싸서 함락시켰다. 현령(縣令)註 002 탈기(脫起)註 003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아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註) 001  적목성(赤木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삭주 연성군(連城郡)조에 “단송현(丹松縣)은 원래 고구려의 적목진(赤木鎭)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고 전한다. 단송현(적목진)은 현재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현리 일대(북한의 강원도 세포군 현리)로 비정된다. 따라서 적목성은 현재 강원도 세포군 현리에 위치한 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성군 - 한국사DB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잡지 제4 >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 연성군
 
연성군(連城郡)註 421은 고구려(高句麗) 각[원주:한편 객(客)이라고 쓴다.]련성군(各連城郡)註 422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423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교주(交州)註 424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3개이다.
단송현(丹松縣)註 425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적목진(赤木註 426鎭)註 427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42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남곡현(嵐谷縣)註 429이다.
질운현(軼雲縣)註 43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관술현(管述縣)註 431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432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알 수 없다.
희령현(狶嶺縣)註 433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저수현현(猪守峴縣)註 434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435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알 수 없다.

 

註) 425  단송현(丹松縣): 통일신라 시기 삭주(朔州) 연성군(連城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난곡면(蘭谷面) 현리(縣里: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 현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90쪽; 정구복 외, 1997d, 280쪽). 본래 고구려 적목진(赤木鎭)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단송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에는 이 기사 외에는 ‘단송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본서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조에 따르면 이해 9월 당군이 매소성(買肖城)에서 신라군에게 크게 격파당한 다음, 말갈군이 적목성(赤木城)을 포위하며 함락시키자 현령인 탈기(脫起)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적목성 전투에 대해 당군이 매소성을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공략한 전투로 이해하기도 하지만(이상훈, 2012, 223~224쪽), 매소성 전투에 패배한 당군이 추가령구조곡 방면으로 퇴각하며 군량 확보나 임시진지 마련을 위하여 추가령 직전에 위치한 적목성 일대를 공격한 전투라고 생각된다(여호규, 2022; 이영수, 2023, 244~247쪽). 적목성 전투는 적목현 곧 단송현이 추가령구조곡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단송현에 상응하는 성곽으로는 회양 난곡산성이 있는데, 주변에 신라 무덤 50기가 있다고 한다(량익룡, 1964; 박성현, 2019, 17쪽). 『고려사』 지리지3 남곡현(嵐谷縣)조에는 고려 현종 9년(1018)에 이름을 ‘남곡’으로 고쳐 교주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7 강원도 회양도호부 속현조에 따르면 남곡현은 회양도호부의 서쪽 30리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량익룡, 1964, 「동해안 일대의 신라 산봉우리성에 관한 연구」, 『고고민속』 1964-2
박성현, 2019, 「6~8세기 신라 동북 경계의 변천과 구조」, 『한국학논집』 77(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여호규, 2022, 「제2장 고대의 연천」, 『연천군지 제2권 연천의 역사』, 연천군
이영수, 2023, 「나당전쟁기 신라 우수주의 군사조직 강화와 운용」, 『한국고대사연구』 110바로가기
 
註) 427  적목진(赤木鎭):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단송현(丹松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 9월조에 말갈군이 적목성(赤木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는 기사가 나온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적목현(赤木縣)으로 나오며, 사비근을(沙非斤乙)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사비근을의 ‘사비(沙非)’는 적목의 ‘적(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파악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253~254쪽).
 
 
 
우수주의 주·군·현·성 - 한국사DB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권 제37잡지 제6 >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 우수주의 주·군·현·성
 
우수주(牛首州)註 227[원주: 수(首)를 두(頭)로 쓰기도 한다. 수차약(首次若)註 228이라고도 하고 오근내(烏根乃)註 229라고도 한다.], 벌력천현(伐力川縣)註 230, 횡천현(橫川縣)註 231[원주: 어사매(於斯買)註 232라고도 한다.], 지현현(砥註 233峴縣)註 234, 평원군(平註 235原郡)註 236[원주: 북원(北原)이다.], 나토군(奈吐郡)註 237[원주: 대제(大提)註 238라고도 한다.], 사열이현(沙熱伊縣)註 239, 적산현(赤山縣)註 240, 근평군(斤平郡)註 241[원주: 병평(並平)註 242이라고도 한다.], 심천현(深川縣)註 243[원주: 복사매(伏斯買)註 244라고도 한다.], 양구군(楊口郡)註 245[원주: 요은홀차(要隱忽次)註 246라고도 한다.], 저족현(猪足縣)註 247[원주: 오사회(烏斯迴)註 248라고도 한다.], 옥기현(玉註 249岐縣)註 250[원주: 개차정(皆次丁)註 251이라고도 한다.], 삼현현(三峴縣)註 252[원주: 밀파혜(密波兮)註 253라고도 한다.], 성천군(狌川郡)註 254[원주: 야시매(也尸買)註 255라고도 한다.], 대양관군(大楊管郡)註 256[원주: 마근압(馬斤押)註 257이라고도 한다.], 매곡현(買谷縣)註 258, 고사마현(古斯馬縣)註 259, 급벌산군(及伐山郡)註 260, 이벌지현(伊伐支縣)註 261[원주: 자벌지(自伐支)註 262라고도 한다.], 수성천현(藪狌川縣)註 263[원주: 수천(藪川)이라고도 한다.], 문현현(文峴縣)註 264[원주: 근시파혜(斤尸波兮)註 265라고도 한다.], 모성군(母城郡)註 266[원주: 야차홀(也次忽)註 267이라고도 한다.], 동사홀(冬斯忽)註 268, 수입현(水入縣)註 269[원주: 매이현(買伊縣)註 270이라고도 한다.], 객련군(客連郡)註 271[원주: 객(客)을 각(各)으로 쓰기도 한다. 가혜아(加兮牙)註 272라고도 한다.], 적목현(赤木縣)註 273[원주: 사비근을(沙非斤乙)註 274이라고도 한다.], 관술현(管述縣)註 275, 저란현현(猪闌峴縣)註 276[원주: 오생파의(烏生波衣)註 277라고도 하며 저수(猪守)註 278라고도 한다.], 천성군(淺城郡)註 279[원주: 비열홀(比烈忽)註 280이라고도 한다.], 경곡현(𢈴谷縣)註 281[원주: 수을탄(首乙呑)註 282이라고도 한다.], 청달현(菁達縣)註 283[원주: 석달(昔達)註 284이라고도 한다.], 살한현(薩寒縣)註 285, 가지달현(加支達縣)註 286, 어지탄(於支呑)註 287[원주: 익곡(翼谷)註 288이라고도 한다.], 매시달(買尸達)註 289, 천정군(泉井郡)註 290[원주: 어을매(於乙買)註 291라고도 한다.], 부사달현(夫斯達縣)註 292, 동허현(東墟縣)註 293[원주: 가지근(加知斤)註 294이라고도 한다.], 나생군(奈生郡)註 295, 을아단현(乙阿旦註 296縣)註 297, 우오현(于烏縣)註 298[원주: 욱오(郁烏)註 299라고도 한다.], 주연현(酒淵縣)註 300.
 
 
註) 273
적목현(赤木縣) :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단송현(丹松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사비근을(沙非斤乙)로도 일컬었다고 나온다. 본서 권35 지리2 삭주조에는 적목진(赤木鎭)으로 나온다. 지금의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난곡면(蘭谷面) 현리(縣里: 북한의 강원도 세포군 현리) 일대로 비정된다. 본서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 9월조에 따르면 말갈군이 적목성(赤木城)을 포위하여 함락시켰다고 한다. 적목성 전투에 대해 당군이 매소성을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공략한 전투로 이해하기도 하지만(이상훈, 2012, 223~224쪽), 매소성 전투에 패배한 당군이 추가령구조곡 방면으로 퇴각하며 군량 확보나 임시진지 마련을 위하여 추가령 직전에 위치한 적목성 일대를 공격한 전투라고 생각된다(여호규, 2022; 이영수, 2023, 244~247쪽). 적목성 전투는 적목현 곧 단송현이 추가령구조곡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잘 보여준다. 본서 권35 지리2 삭주조 ‘단송현’ 항목 참조.
 
〈참고문헌〉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여호규, 2022, 「제2장 고대의 연천」, 『연천군지 제2권 연천의 역사』, 연천군
이영수, 2023, 「나당전쟁기 신라 우수주의 군사조직 강화와 운용」, 『한국고대사연구』 110
 
註) 274
사비근을(沙非斤乙) : 신라 삭주 연성군(連城郡) 소속 단송현(丹松縣)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는 적목현(赤木縣)의 다른 이름이다. 사비근을의 ‘사비(沙非)’는 적목의 ‘적(赤)’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파악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253~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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