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44_0010_0020


농안 노변강유적(農安 老邊崗遺蹟)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2008년 ~ 2009년장복유(張福有), 손인걸(孫仁傑), 지용(遲勇)· 또 덕혜시 구간의 조사에는 덕혜시 문물보호관리소 부소장 손동문(孫東文) 등이 참가하였음·· 2008년 5월 12일부터 20일까지 德惠 송화강 우안에서 출발하여 農安, 公主嶺, 梨樹, 昌圖, 開原, 鐵嶺, 沈陽, 遼陽, 開州, 營口까지 야외조사를 실시하였고 23일에 길림시로 돌아오는 길에 楡樹, 扶餘 송화강 우안까지 조사하였으며, 또 2009년 4월 3일에서 5일(3일간)까지 遼陽, 營口, 開州 등지를 재조사 하였는데, 2008-2009년 두 차례에 걸쳐 李健才·馮永謙·崔德文·崔艶茹의 선행 조사를 기초로 하여 길림·요녕성의 노변강 전 구간을 답사, 노변강에 대한 최초의 전면적 조사를 실시하였음.

 


구조특징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구간은 마치 물고기의 등 모양처럼 지표보다 돌기한(凸起) 한 갈래의 흙둑(土塄)으로 보임. 노변강 성벽 기초의 구축 방법은 德惠(덕혜) 경내의 성벽 기초 구축 방법과 같으며, 구덩이(溝/구)를 파서 얻은 흙을 다져 쌓았음.

 


역사적 의미


1) 노변강 유적이 천리장성의 일부라는 설


이건재는 길림성 農安(농안)·公主嶺(공주령)(舊 懷德/구 회덕)·梨樹縣(이수현)과 요녕성 경내 요하 동안 일대의 ‘노변’·‘변강’ 관련 지명의 분포 현황과 公主嶺市(공주령시)(舊 懷德縣/구 회덕현) 노변강 유적의 뻗어나가는 방향이 합치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公主嶺市(舊 懷德縣) 노변강 유적은 農安(농안)∼營口(영구)에 걸친 장성유적의 일부라고 파악하였음.[李健才, 1987] 왕건군은 노변강 유적은 農安 곧 부여성에서 서남의 바다에 걸쳐 구축한 천리장성의 일부라고 파악하였음. 公主嶺市(舊 懷德縣)를 중심으로 한 노변강 유적은 천리장성의 경로 가운데 송화강∼요하의 분수령지대에 해당하는데 다른 시기 장성 유적의 경로와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고구려 천리장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2) 노변강 유적은 ‘고구려 천리장성이 아니다’설


노변강 유적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 『奉天通志』, 『懷德縣志』 등에서는 별다른 고증없이 漢代 障塞(한대 장새) 또는 明(명)과 蒙古(몽고)의 경계선 등으로 파악하였고, 『懷德縣文物志』에서는 遼代(요대) 주요 성들이 노변강 서쪽에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동북 여진의 봉기를 막기 위한 遼代의 방어시설로 파악하였음. 李文信이 서풍 성자산산성을 고구려의 부여성으로 비정한 이래 요녕성의 학자들은 서풍 성자산산성보다 서북쪽에 위치한 懷德縣(회덕현)의 노변강유적은 천리장성과 관련없는 유적으로 파악하였음. 陳大爲는 부여성(서풍)에서 사비성(大連/대련)에 이르는 서부 국경의 前沿邊境(전연변경)상에 최종적으로 구축한 山城聯防線(산성연방선)으로 파악하였음. 그리고 부여성 등의 대형산성은 평원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지역에 일직선으로 위치하였는데, 이들은 천리장성의 방어선에서 중점 성보를 이루었다고 보았음. 그러나 1995년 기존 견해를 수정하여 천리장성의 축조로 동북∼서남의 山城聯防線이 완성되었다고 보면서 요하 동쪽 산성과 요하 사이에 별도로 장성을 구축하였다고 보았음[陳大爲, 1989,1995]. 


梁振晶도 부여성∼사비성 구간의 기존 성들을 연결한 山城聯防線이라는 설을 제기하였음. 요하 동안의 자연지형상 요하 자체가 천연해자로서 제1방어선이며, 요하와 山城聯防線 사이는 평원지대로서 장성을 구축하기에 불리한 지형임. 그리고 農安古城(농안고성)에서는 고구려 유적·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반면 서풍 성자산산성에서는 고구려 시기의 건물지가 많이 존재하므로 장성의 동북단인 부여성으로 비정되며, 장성의 서남단도 평지인 營口(영구)보다는 사면이 절벽인 대흑산성이 적합하다는 것임. 더욱이 農安(농안)∼懷德(회덕)의 노변강 유적에서는 연대를 비정할 수 있을 만한 유물이 출토된 바 없으며, 營口市 북쪽에서 고구려시기 평지성인 태평보고성이 발견되었지만 주변에는 천리장성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임[梁振晶, 1994] 


王綿厚은 천리장성의 축조로 기존 산성방어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파악하면서 陳大爲의 수정 견해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함. 다만 기존의 산성연방선 외에 요하 양안에 두 줄기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고 추정하고, 무려라(통정진)를 요하 서안 전연방어선의 대표적인 장새로 파악하였으며, 천리장성의 축조로 ‘雙重(쌍중)방어장벽’이 완성되었다고 봄[王綿厚, 1990 ; 王綿厚 1994]. 


한편 최근 신형식은 길림성과 요녕성 학자의 견해를 절충한 신설을 제기하였음. 農安∼營口의 요하 연안에는 본래 물자소통을 위한 河邊路(하변로)가 있었는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시설이 최초의 천리장성이라고 함. 그런데 수·당과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발해와 서해 등 해안방어선의 전략적 중요도가 높아지게 됨으로써 신성(무순 고이산성)에서 요동반도 서남단의 비사성(대련 대흑산성)에 이르는 산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천리장성을 구축하였다고 함. 시대에 따라 전략적 중요도가 변화하면서 천리장성의 경로나 기능도 변화하였다고 봄[신형식, 1997 ; 신형식 1999].


李成制는 그동안 고구려 천리장성은 중국학계가 장성으로 추정한 유적을 토대로 연구되었고 장성의 흔적이라 여겨온 ‘老邊崗(노변강)’은 성벽으로 볼 수가 없으며, 요동의 산성들을 연결하는 성벽을 추가로 세워 장성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논거에 문제가 있기에 여전히 성격이 불분명한 遺構(유구)를 장성으로 추정하고 천리장성의 형태를 논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음. 또한 唐軍(당군)의 공격과정을 다룬 기록들 어디에도 장벽에 대한 기술이 없는 반면 요하와 玄菟城(현도성) 사이에는 烽燧(봉수)들이 늘어서 있었다는 사실이 찾아지므로 이 봉수선이 천리장성의 한 부분일 것이라고 이해하였음[李成制, 2014].

 


자연환경

 

伊通河(이통하)와 新開河(신개하)가 교차하는 곳은 그 지세가 비교적 낮은데, 이 곳의 노변강 성벽 유적은 이미 평지가 되었음. 龍王鄕 西邊崗屯(용왕향 서변강둔)에서 서남방향으로는 벼농사를 위한 한 조각의 커다란 논을 이루고 있어서, 이곳의 변강 유적도 이미 존재하지 않음. 三崗鄕 廂房子山頭村(삼남향 상방자산두촌)부터 구릉지대로 진입되는데 이 구릉은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음.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1985, 『懷德縣文物志』

· 馮永謙·何薄瀅, 1986, 『遼寧古長成』, 遼寧人民出版社

· 王建群, 1987, 「高句麗千里長城」『博物館硏究』1987-3

· 李健才, 1987, 「東北地區中部的邊崗和延邊長城」『遼海文物學刊』1987-1

· 陳大爲, 1989, 「遼寧境內的高句麗遺蹟」『遼海文物學刊』1989-1

· 王綿厚, 1990, 「東北古代夫餘部的興衰及王城變遷」『遼海文物學刊』1990-2

· 馮永謙, 1992, 「東北古代長城考辨」『東北亞歷史與文化』, 遼沈書社

· 王綿厚, 1994,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綜合硏究」『遼海文物學刊』1994-2

· 梁振晶, 1994, 「高句麗千里長城考」『遼海文物學刊』1994-2

· 陳大爲, 1995,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1995-3

· 遼寧城長成學會, 1996, 『遼寧長成』, 瀋陽

· 신형식, 1997, 「고구려 천리장성 연구」『백산학보』49

· 李健才·劉素雲(주편), 1997, 『東北地區燕秦漢長成和郡縣城的調査硏究』, 吉林文史出版社

· 신형식, 1999, 「천리장성」『한국의 고대사』삼영사

· 余昊奎, 1999, 『高句麗 城』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 余昊奎, 2000, 「高句麗 千里長城의 經路와 築城背景」『국사논총』91

· 張福有·孫仁傑·遲勇, 2010, 「高句麗千里長城調査要報」『東北史地』2010-3

· 張福有·孫仁傑·遲勇, 2010, 『高句麗千里長城』, 吉林人民出版社

· 李成制, 2014, 「高句麗 千里長城에 대한 기초적 검토」『嶺南學』25 


고구려 천리장성과 주요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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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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