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20_0010_0010

* 제목에 지명을 추가했습니다.


노변강유적(老邊崗遺蹟)

 


형태사항 : 총 길이 약 52㎞ 

출토지 : 길림성 사평시 공주령시(구 회덕현)(吉林省 公主嶺市(舊 懷德縣))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71중앙민족학원 연구실, 길림성박물관, 길림사범대학, 회덕현문화부
(中央民族學院硏究室, 吉林城博物館, 吉林師範大學, 懷德縣文化部)
1971년 10-11월경 왕건군 일행이 중앙민족학원 연구실, 길림성 박물관, 길림사범대학, 회덕현 문화부 등과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여 회덕현(현 공주령시) 경내의 변강 유적을 조사하였음. 참가자는 이석민(李碩民), 왕건군(王健群), 목굉리(穆宏利)(조장), 임지둔(林志純), 곽의생(郭毅生), 진연개(陳連開), 진상위(陳相偉), 곽문괴(郭文魁) 등임. 등자가(戥子街)를 출발하여 북으로 남평안보(南平安堡), 노성보(老城堡), 삼황묘(三皇廟), 진가요보(陳家窯堡), 변강(邊崗) 등을 경유하여 농안현(農安縣) 경계지점의 후강(後崗) 일대에 이르는 18개촌을 5일동안 조사하였음.
1974중앙민족학원 연구실, 길림성박물관, 길림사범대학, 회덕현문화부
(中央民族學院硏究室, 吉林城博物館, 吉林師範大學, 懷德縣文化部)
1974년 회덕현(현 공주령시) 서남쪽의 이수현(梨樹縣), 창도현(昌圖縣) 등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회덕현(현 공주령시) 노변강 유적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고 함.
1983중앙민족학원 연구실, 길림성박물관, 길림사범대학, 회덕현문화부
(中央民族學院硏究室, 吉林城博物館, 吉林師範大學, 懷德縣文化部)
1983년 농안(農安) 서남부의 순산고성(順山古城)을 조사할 때 변강유적이 회덕(현 공주령시)에서 농안지역으로 들어가는 상황을 들었다고 함.
1983년 5월 회덕현 고고조사단에서 『회덕현문물지』편찬 기초자료 수집의 일환으로 노변강 유적에 대해 재조사하였는데, 전체적인 상황은 1971년 조사결과와 거의 동일하였다고 함.


 

구조특징


공주령 노변강 유적의 전체 현황은 다음과 같음. 공주령시 경내 노변강 성벽 유적은 총 길이 약 52㎞정도임. 공주령시 경내 노변강 성벽 유적의 방향은 대체로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있으며, 일부 구간은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도 함. 보존상황으로 볼 때 대부분의 지방의 지표에 드러난 유적 현상은 비교적 선명하며, 지표에 물고기의 등 모양처럼 튀어나온 흙둑을 제외하면 일부 구간의 성벽 유적의 잔고는 약 4m 정도이며, 길림성과 요녕성 두 지역의 노변강 가운데 성벽 가운데 기초 유적의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구간임. 노변강 성벽 기초의 구축 방법은 황색점토와 검은색 흙을 서로 교차해서 다져 만들었음. 황색 점토는 바깥에 활용되고, 검은색 흙은 곧 땅을 파는 곳에 활용됨. 이 곳의 변강(邊崗), 소변(小邊) 등 지명도 노변강 성벽 기초가 뻗어 지나가는 땅에서 얻어진 이름임. 조사 방문시 해당 지역의 마을 주민 모두 노변강의 위치와 뻗어나가는 방향을 확실하게 알려주었음.


공주령 노변강 유적의 세부 상황은 다음과 같음. 노변강 성벽 기초는 농안현(農安縣) 삼도강향(三道崗鄕) 왕변강둔(汪邊崗屯)의 갈림길 입구(岔路口)에서 공주령시 경내의 쌍성보진(雙城堡鎭) 행복촌(幸福村) 대우권둔(大牛圈屯)으로 들어감. 대우권둔 서쪽 100m 되는 곳에 노변강 성벽 기초가 있음. 조사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4분 303초, 북위 44도 02분 496초, 해발 230m임. 노변강 성벽 기초는 지표보다 높은 흙둑이 한 갈래 뻗어있음. 흙둑의 너비 8-10m, 높이 0.5m이며,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뻗어있음. 조사 방문시 현지 마을 주민 于春波(59세)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 노변강 뒤쪽으로 변강도(邊崗道)라 불리는 차도가 개설되어 있다고 함. 변강도는 변강촌으로 통하며, 또 홍기촌(紅旗村), 서가점둔(徐家店屯) 방향으로도 통함. 현재 도로가 이런 종류의 땅을 이미 훼손시켰다고 함. 서변강둔(西邊崗屯) 동쪽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4분 175초, 북위 44도 02분 398초, 해발 232m임. 이 곳 노변강 성벽 기초는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뻗어있음. 현재의 보존 상황은 노변강 성벽 기초 동측면은 지표와 평행하며, 서측면은 높이 약 0.8m임. 이 지점 앞 약 300m 되는 곳에서 향로(鄕路)와 다시 합쳐짐.


노변도(老邊道) 조사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3분 442초, 북위 44도 01분 363초, 해발 237m임. 이 지점은 대 농지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노변강 성벽 기초가 현지에서 노변도(老邊道)라고 부르는 농업용 차도로 이미 개발되어 있음.


기타 노변강 성벽 기초는 또 서가점둔(徐家店屯)의 동측과 고가둔(高家屯)의 서측을 지나서, 조사지점 중심 지리좌표 동경 124도 42분 580초, 북위 44도 00분 674초의 지점에서 서남방향으로 뻗어, 다시 강덕둔(姜德屯)→추가둔(鄒家屯)→양가로둔(梁家爐屯) 쪽으로 뻗어있음. 이 노변강 성벽 기초는 모두 농업용 차도로 개발되어 있음.


팔도구촌, 변강둔, 황화촌 등의 유적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음. 팔도구촌 서쪽의 조사지점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0분 382초, 북위 43도 56분, 564초, 해발 286m임. 지표는 약간 융기해 있으며, 그 위로는 농촌 길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음. 조사 방문시 현지 농민 대왕춘(代玉春)과 47세의 동계원(董桂媛), 두 사람 모두 노변강과 변강도의 뻗어나간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음. 팔도구촌→변강둔→황화촌의 노변강 도로로 뻗어나가며, 예전의 벽체 높이는 약 4-5m 정도로 높았었는데 나중에 흙을 매립하고, 땅을 파는 등 도로를 닦으면서, 특히 문화혁명시기에 땅을 농지로 개간하면서 대부분의 벽체가 오늘날과 같은 키 낮은 노변강으로 변하였다고 지적하였음. 황화촌(黃花村) 변강둔(邊崗屯) 북쪽 1,000m 되는 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0분 312초, 북위 43도 56분 132초, 해발 292m임. 노변강 성벽 기초는 현존 너비 6~7m이며, 서측면은 높이 1-1.2m, 동측면은 경사진 비탈임.


회덕진 진가촌 변강둔의 노변강 유적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음. 진가촌 변강둔에서 노변강 유적 조사를 위해 현지 농민인 61세의 소진용(蘇振龍)씨를 방문하였음. 소진용 농부의 안내로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변강둔 북쪽 구간에 도착, 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0분, 000초, 북위 43도 56분 185초, 해발 301m임. 변강둔 북쪽 약 1,200m 지점에서 트인 곳(缺口)이 하나 있으며, 트인 곳(缺口)의 너비는 약 20m. 소진용 농부에 의하면 트인 곳(缺口)의 원래 너비는 약 2m 정도였다고 함. 북측의 단면으로 볼 때 노변강 성벽의 기초 너비는 약 7m이며, 윗(頂端) 너비 약 3m 정도, 잔고 약 2.1m임. 트인 곳(缺口)의 위치 및 현재 상태로 보아 이 곳은 문길(門道)이었을 가능성이 있음. 동측에도 높이 1m 정도, 너비 3m 정도의 흙더미(土堆)가 있는데, 이 흙더미도 문길의 옹문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됨. 노변강 성벽 기초 북측 단면으로 보아, 구축방법은 황색의 점토와 검은색 흙을 섞어 다져(판축하여) 축성하였음. 다진 층의 흔적이 분명하여 한 층은 황색 점토층 또 한 층은 검은색 토층, 황색 점토층은 일반적으로 두께 15-35㎝, 검은색 토층은 일반적으로 두께 18-30㎝임. 노변강 성벽 기초 북측 단면으로 보아, 구축방법은 황색의 점토와 검은색 흙을 섞어 다져(판축하여) 축성하였음. 다진 층의 흔적이 분명하여 한 층은 황색 점토층 또 한 층은 검은색 토층, 황색 점토층은 일반적으로 두께 15-35㎝, 검은색 토층은 일반적으로 두께 18-30㎝임. 변강둔 남쪽 구간의 조사 지점은 북쪽의 변강둔에서 약 1,000m 떨어진 곳임.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약 124도 40분 26초, 북위 43도 55분 371초, 해발 281m임. 이 곳 노변강 성벽 기초는 동남에서 서북방향으로 뻗어있으며, 벽체는 대부분 한 쪽이 비교적 높은 지세에 의지하여 성벽을 축조하였음. 벽체 기초 너비 6m, 윗 너비 2-4m. 현재 최고 높이는 약 4m 정도임. 변강둔 남쪽 노변강 유적에서 1,000m 연장된 지점은 진가촌(陳家村) 노변둔 남쪽 구간임. 이 구간의 노변강 성벽 기초 유적은 길림성 경내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한 구간임. 2007년도에 길림성 중점 문물보호단위가 되었음.


남평촌(南平村) 노변강둔의 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38분 999초, 북위 43도 45분 717초, 해발 212m임. 이 곳의 노변강 유적은 비교적 선명함. 광가와붕둔(廣家窩棚屯) 북쪽부터 노변강 성벽 기초가 저지대로 진입하여 선명하지 않으며, 변강둔, 변서둔(邊西屯), 소변둔(小邊屯) 등에 이른 이후 다시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음. 일반적으로 농로가 되거나 밭으로 구획되었음. 노변강 성벽 기초는 장주둔(張朱屯)까지 뻗은 다음 이수현(梨樹縣) 소성자진(小城子鎭) 경계내로 들어감. 동요하 연안의 저지대를 통과하는 곳에는 유적이 보이지 않음.


 

역사적 의미

 

고구려 천리장성설이 있음. 노변강 유적을 고구려 천리장성의 일부로 파악한 연구자는 이건재와 왕건군임. 이건재는 길림성 농안·공주령(구 회덕)·이수현과 요녕성 경내 요하 동안 일대의 ‘노변’· ‘변강’ 관련 지명의 분포 현황과 공주령시(구 회덕현) 노변강 유적의 뻗어나가는 방향이 합치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공주령시(구 회덕현) 노변강 유적은 농안~영구에 걸치 장성유적의 일부라고 파악하였음. 나아가 농안이 고구려 천리장성의 출발점인 ‘부여성’임을 논증하고, 영구는 천리장성의 종착점인 ‘서남지해(西南至海)’로 보았음. 실제 농안과 영구는 동북~서남방향의 천리장성의 방향(走向)과 부합할 뿐 아니라 거리상으로도 천여리라고 함(이건재, 1987). 


왕건군은 1971년 이래 노변강 유적에 대한 조사결과를 약술한 다음, 노변강 유적을 따라 영구까지 다녀왔다는 현지 주민의 증언을 근거로 노변강 유적이 본래 농안에서 영구에 걸쳐 존재하였다고 추정하였음. 그리고 노변강 유적은 농안 곧 부여성에서 서남의 바다에 걸쳐 구축한 천리장성의 일부라고 파악하였음. 이와 함께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국력이 쇠퇴한 상태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장성은 이름뿐이고 실제로는 하나의 토루에 불과하다고 주장함. 또한 천리장성은 변경 성보의 외곽에 축조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북 부여성(농안)에서 서남의 사비성(대련)에 걸친 변경의 주요 군사중진을 연결한 보조시설에 불과하다고 보았음. 천리장성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당과 고구려의 공방전에서 천리장성은 전혀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임. 


천리장성의 경로 설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東北自夫餘城 西南至海 千有餘里’(『구당서』 동이전 고려조)라는 장성의 양 끝단과 거리임. 동북단인 부여성은 20세기 전반 이래 대체로 농안 일대로 비정되고 있음. 서남단의 ‘해(海)’는 요하 하구인 영구와 요동반도 남단이 대련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임. 그런데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면 이는 군사방어력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에서 나왔을 것임. 따라서 지형조건과 군사전략적으로 보더라도 서남의 ‘해’는 요하 하구인 영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 농안에서 거리상 천여리인 곳도 영구임. 그러므로 천리장성의 경로는 송화강~요하의 분수령지대의 송료대평원을 가로질러 동요하에 이른 다음, 요하 동안을 따라 요하 하구인 영구 일대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공주령시(구 회덕현)를 중심으로 한 노변강 유적은 천리장성의 경로 가운데 송화강~요하의 분수령지대에 해당하며, 천산산맥에서 50-100㎞ 정도 떨어진 요하 동안처럼 대흑산맥에서 서쪽으로 대략 50㎞ 떨어진 거리에 위치함. 이 구간의 노변강 유적은 다른 시기 장성 유적의 경로와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고구려 천리장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여호규, 1999).


노변강 유적의 고구려 천리장성 부정설이 있음. 노변강 유적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 『봉천통지(奉天通志)』, 『회덕현지(懷德縣志)』 등에서는 별다른 고증없이 한대(漢代) 장새(障塞) 또는 명(明)과 몽골(蒙古)의 경계선 등으로 파악하였고, 『회덕현문물지(懷德縣文物志)』 에서는 요대 주요 성들이 노변강 서쪽에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동북 여진의 봉기를 막기위한 요대(遼代)의 방어시설로 파악하였음. 이문신(李文信)이 서풍 성자산산성을 고구려의 부여성으로 비정한 이래 요녕성의 학자들은 서풍 성자산산성보다 서북쪽에 위치한 회덕현의 노변강유적은 천리장성과 관련없는 유적으로 파악하였음. 진대위(陳大爲)는 부여성(서풍)에서 사비성(대련)에 이르는 서부 국경의 전연변경(前沿邊境)상에 최종적으로 구축한 산성연방선(聯防線)으로 파악하였음. 그리고 부여성 등의 대형산성은 평원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지역에 일직선으로 위치하였는데, 이들은 천리장성의 방어선에서 중점 성보를 이루었다고 보았음(진대위, 1989). 


양진정(梁振晶)도 부여성~사비성 구간의 기존 성들을 연결한 산성연방선이라는 설을 제기하였음. 요하 동안의 자연지형상 요하 자체가 천연해자로서 제1방어선이며, 요하와 산성연방선 사이는 평원지대로서 장성을 구축하기에 불리한 지형임. 그리고 농안고성에서는 고구려 유적·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반면 서풍 성자산산성에서는 고구려 시기의 건물지가 많이 존재하므로 장성의 동북단인 부여성으로 비정되며, 장성의 서남단도 평지인 영구보다는 사면이 절벽인 대흑산성이 적합하다는 것임. 더욱이 농안~회덕의 노변강 유적에서는 연대를 비정할 수 있을 만한 유물이 출토된 바 없으며, 영구시 북쪽에서 고구려시기 평지성인 태평보고성이 발견되었지만 주변에는 천리장성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임(양진정, 1994). 


한편 진대위는 1995년 기존 견해를 수정하였음. 천리장성의 축조로 동북~서남의 산성연방선이 완성되었다고 보면서 요하 동쪽 산성과 요하 사이에 별도로 장성을 구축하였다고 종전 견해를 약간 수정하였음(진대위, 1995). 


왕면후도 진대위의 수정 견해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였음. 천리장성의 축조로 기존 산성방어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파악하였음. 다만 기존의 산성연방선 외에 요하 양안에 두 줄기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고 추정하고, 무려라(통정진)를 요하 서안 전연방어선의 대표적인 장새로 파악하였으며, 천리장성의 축조로 ‘이중(雙重)방어장벽’이 완성되었다고 봄(왕면후, 1990; 왕면후 1994). 


한편 최근 신형식은 길림성과 요녕성 학자의 견해를 절충한 신설을 제기하였음. 농안~영구의 요하 연안에는 본래 물자소통을 위한 하변로(河邊路)가 있었는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시설이 최초의 천리장성이라고 함. 그런데 수·당과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발해와 서해 등 해안방어선의 전략적 중요도가 높아지게 됨으로써 신성(무순 고이산성)에서 요동반도 서남단의 비사성(대련 대흑산성)에 이르는 산성을 연결하는 새로운 천리장성을 구축하였다고 함. 시대에 따라 전략적 중요도가 변화하면서 천리장성의 경로나 기능도 변화하였다고 봄(신형식, 1997; 신형식, 1999).


 

자연환경

 

길림성 공주령시(구 회덕현) 경내의 노변강 유적은 ① 쌍성보진(雙城堡鎭) 대우권둔(大牛圈屯), 서변강둔(西邊崗屯) 등 ② 팔도구촌(八道溝村), 변강둔(邊崗屯), 황화촌(黃花村) 등 ③ 회덕진(懷德鎭) 진가촌(陳家村) 변강둔(邊崗屯) 등에서 확인됨.


쌍성보진 대우권둔, 서변강둔 등 노변강 유적에서 확인된 경우 첫째, 대우권둔 서쪽 100m 되는 곳에 노변강 성벽 기초가 위치하며, 조사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4분 303초, 북위 44도 02분 496초, 해발 230m임. 둘째, 서변강둔 동쪽의 조사 지점에서, 그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4분 175초, 북위 44도 02분 398초, 해발 232m임. 셋째, 다른 한 곳의 조사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3분 442초, 북위 44도 01분 363초, 해발 237m임. 이 지점은 대 농지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노변강 성벽 기초가 현지에서 노변도(老邊道)라고 부르는 농업용 차도로 이미 개발되어 있음.


팔도구촌, 변강둔, 황화촌 등 노변강 유적에서 확인된 경우 첫째, 팔도구촌 서쪽 조사지점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0분 382초, 북위 43도 56분, 564초, 해발 286m임. 둘째, 황화촌 변강둔 북쪽 1,000m 되는 곳을 조사했는데, 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0분 312초, 북위 43도 56분 132초, 해발 292m임.


회덕진 진가촌 변강둔 등 노변강 유적에서 확인된 경우 첫째, 회덕진 진가촌 변강둔 북쪽 구간, 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40분, 000초, 북위 43도 56분 185초, 해발 301m임. 둘째, 변강둔 남쪽 구간 조사 지점은 북쪽의 변강둔에서 약 1,000m 떨어진 곳으로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약 124도 40분 26초, 북위 43도 55분 371초, 해발 281m임. 셋째, 남평촌(南平村) 노변강둔 조사 지점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4도 38분 999초, 북위 43도 45분 717초, 해발 212m임.


길림성 공주령시(구 회덕현) 노변강 유적은 요하(遼河) 수계인 동요하(東遼河)와 송화강(松花江) 수계인 이통하(伊通河) 경계지대에 걸쳐 있음. 이 일대 지형은 공주령시 회덕진 조사지점 소재지가 해발 301m로 가장 높으며, 공주령시에서 서북방향으로 뻗은 구릉성 평지를 경계로 동요하와 이통하 수계가 나누어짐. 그러나 양쪽 사면의 경사도가 완만하기 때문에 수계를 구분할 만한 뚜렷한 분수령은 없음. 오히려 두 수계의 경계지대에도 송화강·요하 유역의 송료대평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노변강 유적도 송료대평원을 따라 서남에서 동북으로 이어지고 있음. 노변강 유적 동남쪽 50㎞ 거리에는 대흑산맥이 노변강 유적과 같은 방향인 서남-동북 방향으로 뻗어있음. 노변강 유적 서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 동쪽 사면과 서료하유역의 사막과 초원지대가 펼쳐짐. 노변강 유적은 농경지구에서 초원·사막지구로 변하는 점이지대임.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懷德縣文物志』, 1985

· 馮永謙·何薄瀅, 『遼寧古長成』, 遼寧人民出版社,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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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健才, 「東北地區中部的邊崗和延邊長城」『遼海文物學刊』 1987-1, 1987

· 陳大爲, 「遼寧境內的高句麗遺蹟」『遼海文物學刊』 1989-1, 1989

· 王綿厚, 「東北古代夫餘部的興衰及王城變遷」『遼海文物學刊』 1990-2, 1990

· 馮永謙, 「東北古代長城考辨」『東北亞歷史與文化』, 遼沈書社, 1991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梁振晶, 「高句麗千里長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遼寧城長成學會, 『遼寧長成』, 瀋陽, 1996

· 신형식, 「高句麗 千里長城의 硏究」『白山學報』 49, 백산학회, 1997

· 李健才·劉素雲, 『東北地區燕秦漢長成和郡縣城的調査硏究』, 吉林文史出版社, 1997

· 申瀅植, 「千里長城」『韓國의 古代史』, 三英社, 1999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余昊奎, 「高句麗 千里長城의 經路와 築城背景」『國史館論叢』 91, 국사편찬위원회, 2000

· 周向永·王兆華, 「遼寧鐵嶺張樓子山城調查」『北方文物』 200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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