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1115150301686
려수전쟁 현장중계 2 - 요동성 전투
[고구려사 명장면 58]
임기환 입력 2018.11.15. 15:03
수양제는 요하를 건너자 다시 조서를 내렸다.
천하에 사면(赦免)을 베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통치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조서의 내용은 고구려 영역 내의 주민을 수 황제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뜻은 이미 1월에 탁군에서 원정군의 출정을 명하는 조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었다. 그 조서 중 "해마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쉬지 않아 요역이 기한이 없으니, 군량 운반으로 힘이 다하고 몸뚱아리가 도랑과 구덩이를 메웠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우니 누구를 따를 것이냐?"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고통받는 고구려 백성들의 위무에 있음을 거듭 천명한 것이다. 근데 따지고 보면 이 조서의 내용은 고구려의 상황이 아니라 정작 수나라의 상황임을 양제 혼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좌우간 이런 연장선에서 장수들에게 다음 명령도 내렸다.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어루만져서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를 풀지 말라."
고구려 원정군과 물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수탈과 노역으로 온갖 원성을 산 수양제가 정작 적국의 땅에 와서는 가장 인자한 황제로서의 덕목을 베풀려고 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이런 명령은 수양제 자신이 이 원정의 주인공이고 여러 조처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 중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수양제는 각 군단의 지휘관에게 이런 명령도 내렸다.
"모든 군사 일의 나아가고 멈춤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아라."
지휘관들의 독단적인 행동을 금지하고 자신이 모든 결정권을 갖는 방식으로 지휘권을 행사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24군의 편제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24군을 좌익 12군, 우익 12군으로 편제하였으나, 각 12군을 지휘하는 지휘 통합기구, 즉 좌군, 우군 사령부가 없다. 실질적으로 24군을 모두 수양제 자신이 직접 통솔하는 형태로 운영한 것이다.
양제 자신도 군대를 이끈 경험이 없지 않지만, 24군의 지휘관 중에는 풍부한 전쟁 경험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양제는 군권을 이들 장군에게 위임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양제가 황제 자신을 중심으로 군사권을 통제하려는 실행의 공간으로 그동안 여러 순행과 대외원정을 활용했음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 원정의 주인공은 총사령관인 오직 수양제 자신뿐이지, 다른 어느 누구도 조연으로라도 부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러한 수양제의 뜻은 수나라 군대의 활동을 적지 않게 제약했고, 반대로 방어를 하는 고구려군에게는 나름 도움이 되었다. 요동성에서의 공방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요하를 건넌 수나라 대군은 5월부터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중핵인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요동성은 과거 한나라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襄平)이었다. 고국양왕이나 광개토왕때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고구려는 요동성을 요동지역 지배의 가장 중심적인 거점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요동성이 아무리 큰 성이라고 해도, 일개 지방성일 뿐이다. 당시 요동성을 지키는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수양제 공격 시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은 없고, 뒷날 645년에 당태종이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때, 당시 요동성에는 군사 2만명, 성 주민 4만명, 양곡 50만석이 있었다고 한다. 수양제 침공 시에도 군사가 이보다 더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의 주민 모두가 방어에 투입된다고 하더라도 어린이나 노약자를 제외하면 군사를 합하여 5만명이 결코 넘지 않는 수이다.
그런데 요동성을 포위하고 있는 수나라 군대는 적어도 수십만 명이었을 것이다. 그 병력은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도 남을 수였다. 요동성 공방전의 상황은 기록이 거의 없다. 하지만 병력 수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성을 지켜낼 수 있었지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군권을 통솔하고 또 자애로운 황제의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양제의 명령은 요동성 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하였다. 황제의 명이 있었으므로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요동성으로 나아가지, 먼저 양제에게 급히 아뢰었는데, 회답이 올 때쯤에는 요동성의 방어도 갖추어져 다시 나가 항거하여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요동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다음달 6월 11일에, 수양제가 직접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의 형세를 살펴보고, 격노하여 여러 장수를 불러 무섭게 힐책하였다. 그리고 성의 서쪽 수 리 떨어진 곳에 육합성(六合城)을 짓고 머물면서 공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은 요지부동이었고, 주변의 여러 성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중국 요양시 백탑 일대 전경 : 과거 요동성이 이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바이두
요하를 건너고 처음으로 공격한 요동성인데, 이 성 하나조차 한 달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자 양제도 초조해졌고, 결국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했다. 이 별동대가 살수에서 패배하고 겨우 일부만이 살아돌아온 시점이 7월 초이고, 양제가 군사를 거두고 돌아간 시점이 7월 25일 무렵이었으니, 요동성은 5월 초부터 거의 3개월 가까이 수나라 대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수양제가 직접 공격을 지휘한 6월 11일부터도 40여 일을 지켜낸 것이다.
기껏해야 군사 2만명에 주민 4만여 명의 힘으로 수양제가 지휘하는 수십만 명의 대군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사실이지 상상조차 쉽지 않다. 십여년 전 필자가 요동성이 있었던 요양의 평지에 답사를 가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요동성 주변 들판을 겹겹이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을 수십만 명의 대군을 보고도 수만 명의 요동성 주민이 한낱 인공 성곽에 의지해서 어떻게 항복하지 않고 농성할 수 있었을까? 여러분들도 한번 상상해 보시라. 나 같으면 어마어마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을 듯했다. 어마어마한 대군의 포위 속에 석 달 가까이 끝까지 농성할 수 있었던 그들의 심성이 과연 무얼까 무엇보다 궁금했다.
수양제의 침공에 대한 역사에서 우리는 살수대첩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 전쟁에서 승리의 진정한 주역은 요동성의 군사와 주민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벌인 석 달간의 필사적인 저항이 수양제와 80만 대군의 진군을 가로막았고 결국 요동성문 앞에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필자는 요동성이 있었던 그곳에 서서 당시의 역사를 상상해보면서, 무엇보다 요동성민의 심성을 상상해보면서 고구려사의 명장면 하나를 새롭게 찾아낼 수 있었다. 역사 탐구의 좋은 방법이 그 시대 사람들의 심성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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