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1129150302221


려수전쟁 현장중계 3 - 평양성 전투

[고구려사 명장면 59] 

임기환 입력 2018.11.29. 15:03 


수양제가 이끄는 백만대군과 전면전을 펼친 612년 전쟁에서 고구려군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전회에서 살펴본 요하 전투와 요동성 전투가 대표적이다. 특히 요동성 전투는 따지고 보면 후일 당태종을 물리친 안시성 전투에 버금가는 빛나는 승리였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평양성 전투 또한 나중에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전투였다. 이 평양성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살수에서의 대승리도 보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여수전쟁 명장면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612년 전쟁에서 수나라 수군(水軍)을 이끈 장군은 내호아(來護兒)였다. 611년에 수양제는 양자강과 회수에서 대규모 수군을 징발하였는데, 대략 7만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그리고 산동반도 동래(東萊·산동성 烟台)에서 선박을 건조케 하였는데, 나중에 황해를 건널 때 함선의 고물과 이물이 연이어진 모습이 수백 리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수양제는 이들 수군 부대를 총애하는 내호아로 하여금 지휘케 하였다.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함선을 건조한 동래(東萊)에서 출진하여 묘도군도를 거쳐 요동반도에 이르고, 여기서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하여 압록강 입구를 지나 패수(浿水), 즉 대동강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마침내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까지 진군하였다.


이들 수군의 행적은 자료상으로 잘 알 수가 없다. 언제 출진하였는지, 어떤 경로로 언제 대동강 입구에 도착하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수양제가 이끄는 육군과 같거나 아니면 다소 늦게 출진하여, 수양제가 요하 서안에 도착한 3월경에는 묘도군도나 요동반도 남단 어딘가에 최소한의 수군 거점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수의 육군이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하기 시작한 4월 중순에서 5월초 쯤에는 평양으로 이어지는 황해 연안을 따라 항해했을 것이다.


본래 수나라 수군의 목적은 군량과 병장기를 가득 싣고 운송하여 수양제가 지휘하는 육군이 평양으로 진격해오면 이들에게 군수품을 보급하는 것이었다. 수나라 군대가 워낙 대군이었기 때문에 육군의 치중대만으로는 원활하게 보급할 수 없었기에, 바닷길을 통한 군수품 보급이 무엇보다 절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내호아 수군의 출진과 항해 일정도 육로군의 진격과 보조를 같이 맞출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두 달 이상 수양제 육군의 발이 묶이면서, 내호아의 수군이 대동강 입구에 먼저 도착하는 형세가 되었던 것이다.


수양제의 대군이 오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내호아는 마침내 고구려군과 맞닥뜨리게되고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사' 기록을 보면 당시 영양왕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평양성 밖에서 수십리 진용을 갖추고, 아우 건무(建武)로 하여금 선봉대를 이끌고 수나라 군을 공격케 하였다. 이에 내호아가 반격하니 고구려군이 많은 군사를 잃고 모두 성 안으로 퇴각했다고 한다. 이 '북사' 기록에는 다른 역사 기록과 달리 내호아의 패전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다. 내호아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은폐와 왜곡한 흔적이 보이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평양성 전투의 초기 상황을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평양성을 공격하려 서둘렀다. 그러자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육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해야 한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첫 전투의 승리에 도취된 내호아는 이를 뿌리치고 정병 4만명을 이끌고 단독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이런 정황을 보면 고구려군은 내호아를 유인하기 위하여 대규모 진영을 벌여 일부러 패배하여 내호아로 하여금 자만케 하고 단독으로 공격케 유인하는 작전을 펼친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군의 계략에 빠진 내호아의 공격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내호아가 거느린 군사가 평양성이 이르자, 고구려군은 맞서 전투를 벌이는 척하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성 안으로 도망하였고, 수나라 군대가 성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평양성 시가지의 풍요로운 모습에 수나라 군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약탈하기에 바빠 대오가 흩어졌다. 이때 성 안의 절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일시에 반격하였고, 진영을 갖추지 못한 수나라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내호아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수천 명 병사만 탈출하여 군선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비록 수나라 수군은 대동강 입구 포구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패배로 인해 나중에 수나라 별동대가 도착하였을 때에도 군수품의 보급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 장안성


이 평양성 전투의 시점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략 요동성 공격이 한창이던 5월 중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아직 수양제가 별동대의 진격을 명령하기 이전이었다. 즉 내호아 수군의 움직임을 보면 애초에 수양제가 고구려의 침공 과정에서 대군의 행군 일정을 어떻게 계획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늦어도 5월경에는 평양성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굴복시키고 천하제패의 축하연을 베풀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인데, 그만 요동성 앞에서 애초의 계획이 다 엉클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평양성에 먼저 도착해 있던 수군마저 고구려군의 유인 작전에 빠져 전투력과 군수품 보급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당시 평양성의 수비 책임을 맡은 고구려군 장군은 영양왕의 동생 건무(建武)였다. 그는 내호아 군과의 전투에서 500명 결사대를 이끌고 적을 유인하였으며, 평양성 외성에서도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여 수나라 군을 궤멸시키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사실 평양 천도 이후 한번도 대규모 침공군이 평양성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상상해보시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수양제의 백만 대군이 요동에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만으로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터인데, 실제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평양성 주민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한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눈앞에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영양왕과 건무가 뛰어난 전략으로 적군을 대패시키고 평양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몸을 아끼지 않고 선봉에 섰던 건무에 대한 평양성 주민들의 신뢰와 인기가 높아졌을 것이고, 이런 배경에서 영양왕이 후사가 없이 죽은 뒤 왕제 건무가 자연스레 왕위를 잇게 되었을 것이다. 평양성 전투는 수와의 전쟁에서 또 한명의 영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사실 건무만이 아니었다. 당시 평양성의 귀족들이나 일반 주민들 모두가 수군과의 전쟁에서 주역이었고 영웅들이었다. 당시 도성 장안성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 평산성(平山城)으로서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나누어진 구조를 갖춘 복합식 성곽이었다. 북성은 방어성, 내성은 왕궁성에 해당하고, 중성은 관청이나 주요 귀족들의 거주지였다. 그리고 외성은 도시의 주민구역을 둘러싼 일종의 나성(羅城)이었다. 평양성 전투 당시 수군이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한 나곽 내부는 곧 외성을 가리킨다. 바로 귀족을 비롯한 일반 주민들의 거주지를 적을 유인하기 위해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수양제의 대규모 침공에 대응하는 고구려의 전략과 전술을 보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공동체로서 결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압도적인 대군을 동원한 수양제 군대와의 전쟁에서 당시 고구려는 모든 국력을 기울여 대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제로 당시 고구려가 구사한 전략과 전술들은 스스로 적지않은 희생을 감수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면은 수나라의 수군을 유인한 평양성 전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적군을 기만하기 위해 평양성 안으로 적군을 끌어들이는 전술 역시 자신의 집 앞마당과 안방을 그대로 적군의 약탈 앞에 내주는 커다란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군의 지도부는 수와의 전쟁과정에서 이러한 전략과 전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수의 별동대에 대한 유인 전략도 마찬가지이다.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고 농성하는 이른바 청야(淸野) 전술은 고구려가 보통 구사하는 전술이지만, 요동에서부터 압록강을 거쳐 수도 평양성까지 이어지는 종심이 매우 깊은 모든 지역에 청야전술을 적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에서도 핵심적인 곳으로, 이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갖고 있던 귀족이나 지방세력의 적극적인 동의 없이는 적용할 수 없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일반민은 물론 귀족들도 자신의 세력 기반이 전쟁터로 쑥대밭이 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지문덕이 우중문이 거느린 별동대를 압록강 일대에서 일차 저지하려는 전술을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가까이 깊숙하게 유인한 전술은 대규모 적군의 격퇴를 위해 최대한의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나름 공동체 의식이 발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수많은 역사 사례를 보면 적의 대규모 침공에서도 나라를 지켜낼 때에는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수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그랬다. 55년 뒤 당의 침공에 굴복할 때는 이와 전혀 달랐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그랬을까? 바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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