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110150305337
려수전쟁 현장중계 5 - 2차 요동성 전투
[고구려사 명장면 62]
임기환 입력 2019.01.10. 15:03
612년 첫 원정에서 요동성 앞에서 군사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던 수양제는 패전의 책임을 온통 우문술에게 뒤집어씌워 쇠사슬로 묶어 낙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양제는 첫 원정의 패배에서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다시 고구려를 원정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봄 정월에 전국에 조서를 보내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으로 모이게 하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수양제는 왜 이렇게 고구려 원정에 집착하였을까? 무엇보다 1차 원정의 실패로 손상된 황제의 자존심과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고 보인다. 다음과 같이 예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원정 조서를 내린 다음달 2월에 수양제는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 같은 보잘것없는 오랑캐가 우리 큰 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기는 일도 할 수 있는 판인데, 이깟 오랑캐쯤이야?"
이에 곽영(郭榮)이란 인물이 이를 만류하였다.
"오랑캐가 예의에 벗어나는 일은 저희 신하들이 처리할 일입니다. 천균(千鈞)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 쏘지 않는 법인데, 어찌 천자의 지위에 계시면서 몸소 작은 도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
위 예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수양제는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고구려에 치욕적 패배를 당한 황제로서의 자존심 회복이 급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당시 수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대부분 고구려 원정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고구려 정벌의 길은 험난한데, 공훈과 이익은 그리 크지 않은 전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 수양제가 친정하게 되면 지난 1차 원정 때와 똑같이 지휘체계가 옥상옥이 되는 상황이 다시 재연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수양제는 듣지 않았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겠다고 나섰다. 수양제는 오직 자신만이 군사 조직의 최정점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듯하다. 이는 고구려 원정이 단지 고구려를 정복하겠다는 목표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시스템을 구축하는 의미가 동시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만 수양제도 이번에는 여러 면에서 전략을 바꾸었다. 1차 원정 때처럼 백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군사적 시위를 펼치는 방식이 아니라, 이번에는 양제도 실제 군사적 효율성을 중시해서 30여 만의 원정군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1차 원정 때에 워낙 대군이다 보니 보급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듯하다. 실제로 1차 원정 패배의 책임을 물어 우문술을 평민으로 강등시켰는데, 2차 원정에 나서면서 수양제는 지난 전쟁의 패배는 우문술의 죄가 아니라 보급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변호해주면서 우문술을 복직시키고 원정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양현감으로 하여금 군량 보급을 철저하게 감독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공격로도 다변화하였다. 4월에 요하를 건넌 수양제는 군사를 나누어 지난 1차 침공 시에 별동대를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한 경험을 갖고 있는 우문술에게 양의신과 더불어 군사를 주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고, 이와는 별도로 왕인공(王仁恭)으로 하여금 고구려 신성(新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진공로를 여러 갈래로 하여 고구려군 방어망을 분산시키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양제 자신은 1차 원정 때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신성은 요동성과 더불어 고구려 요동 땅을 지키는 가장 중심적인 방어기지였다. 왕인공이 신성을 공격한 것은 신성에 주둔하고 있는 수만 고구려 군사가 요동성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컸다. 이를 통해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1차 원정 시에 신성의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공격하는 수의 본진을 위협하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평양성을 공격하는 우문술과 양의신의 군대 또한 평양성 공격이 목표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 원정 때 30만 별동대를 투입했어도 실패했던 평양 진공이 성공하리라고는 수양제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군대의 목적은 아마도 요동성에서 오골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차단하거나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평양에서 올라오는 구원군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요동성에서 대한 고구려 구원군의 길목을 막아놓고 수양제는 지난 원정의 치욕을 씻고자 요동성 공격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력 시위에 중점을 둔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수양제도 요동성 공격을 위해 단단히 준비하였다. 성을 공격하는 높은 누각인 비루당(飛樓木童), 높은 사닥다리인 운제(雲梯), 성벽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성벽 밑 굴을 파서 공격하는 지도(地道) 등 갖가지 최신 공성 무기들을 총동원하였다. 예컨대 운제의 장대 길이가 15길, 즉 대략 40m가 넘었는데, 수나라 군이 충제의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하였다.
공성구/출처=바이두
그러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요동성은 20여 일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수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100만여 개의 포낭에 흙을 담아 성과 같은 높이로 나란히 둑을 쌓았는데 이를 어량대도(魚梁大道)라고 부르면서 그 위에서 공격하고, 한편으로 성보다 훨씬 높은 거대한 수레를 만들어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보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수군의 총공격 앞에 요동성도 함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수군의 후방 여양(黎陽)에서 군량 수송의 책임을 맡고 있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키고, 많은 고관 자제들이 이에 호응한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사실 지난 수양제의 1차 정벌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수의 국내 사정은 심상치 않았다. 대운하 건설 등 대규모의 공사와 원정이 거듭되면서 수의 농민은 피폐해졌다. 여기에 고구려 원정으로 전국에 있는 수백만 농민이 징집되어 병역과 요역에 충당되었고, 민간의 수레나 소·말 등도 대부분 징발되었다. "출정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은 본업을 잃었다"는 기록처럼 농촌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고 농민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마침내 수의 농민들은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특히 2차 원정 시에는 농민 봉기군도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고, 군현을 점령할 정도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는 것을 본 양현감은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의 동도(東都) 낙양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수양제의 진중에 있던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은 평소 양현감과 친하게 지내던 터이라 처형될까 두려워 고구려로 투항하였다.
이처럼 본국의 사정이 급박하게 되자 요동성 함락을 눈앞에 둔 수양제도 군사를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곡사정의 투항으로 고구려군도 수의 내부 사정을 잘 알게 된 터라 고구려군의 반격을 피하기 위해 철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제는 산처럼 쌓아놓은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를 그대로 두고, 보루와 장막도 미처 거두지 못한 채 밤에 몰래 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군 역시 혹 수양제의 계략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워낙 대군인지라 수군을 추격하다가 요하를 건너지 못한 수만 명의 후미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돌아온 수양제는 우문술 등을 투입하여 양현감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8월에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미 수나라 통치 기반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천하에 열의 아홉은 도적이 되어 말을 훔치고 창을 만들어 성읍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백성들이 "요동 땅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고 외치면서 호응했다고 하니, 고구려 원정길이 수나라 멸망의 길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된 셈이다.
수양제의 2차 침공을 또다시 좌절시킨 요동성 전투는 그동안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때의 요동성 전투 또한 1차 침공 때의 요동성 전투 못지않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양제는 1차 때와는 달리 2차 침공 시에는 아예 요동성 함락을 목표로 하여 최신 공성 도구들을 총동원하였다. 이런 공성구들은 고구려군으로서도 매우 낯선 무기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임기응변으로 적절하게 대응하여 이 공성구들을 무력화시켰다. 수양제는 마지막 공성용 토목공사로 어량대도라는 거대한 토루를 쌓았다. 이 토루는 후일 당태종이 안시성 공격 때 최후의 수단으로 쌓은 토산을 연상시킨다.
수양제 군대가 그대로 두고 간 갖가지 공성 무기들과 토루 건축 등은 고구려인들에게 적의 공성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후일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특히 안시성에서 장기간 항전할 때 당군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고구려군의 대응 역시 이때 수양제의 공격 방식이나 공성 도구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항전 의지만으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1차, 2차 거듭되는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동성 전투의 주인공들은 30여 년 뒤 당과의 전쟁에서의 승리 또한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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