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7_0090_0030_0020
2) 백제의 직접지배 시도
5세기 후반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될 즈음 성주의 반파가 백제가 장악하고 있던 己汶(기문)을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백제와 반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는데 결국 백제가 기문을 다시 장악하게 된다.802) 이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북부가야 지역의 반파 등이 독자적인 색채를 보인 데 대해서 백제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백제로서는 대고구려전에 있어서 후방기지에 해당되는 가야지역의 반백제적인 움직임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문을 둘러싸고 반파와 백제가 분쟁을 계속하고 있을 즈음에 신라도 본격적으로 가야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532년에는 금관가야 등의 통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그 세력하에 있던 가야에 대한 신라의 진출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로 가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서기≫흠명기 4년(543)조와 5년조 등에는 백제가 가야에 배치한 군령·성주와 일계 백제관료(일본의 성과 씨를 가진 백제의 관료를 지칭함)들의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안라가야 등과 백제가 논란을 벌이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郡令(군령)」이나「城主(성주)」는 그 명칭으로 보아서 지방장관의 명칭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늦어도 6세기 중반까지는 백제가 그 지방장관을 가야지역에 배치하여 직접지배를 시도한 셈이 된다.
그런데 백제가 임나지역에 배치한 지방장관으로서 최초로 확인되는 인물이 穗積臣押山(호즈미노오미오시야마/수적신압산)이다. 그에 관한 기사에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백제가 파견한 가야 下哆唎(하치리)의 지방장관으로 등장하고 있다.803) 따라서 그가 지방장관으로서 등장하는 529년경에는 백제가 가야지역에 지방장관을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백제가 가야지역에 지방장관을 배치한 것은 반파 등의 독자적인 움직임과 신라가 가야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금관가야의 통합에 이르는 5세기 전반에 가야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취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백제군의 가야 진주나 지방장관의 배치는 남가야가 멸망하는 532년까지는 고령가야를 중심으로한 북부 가야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사실은≪일본서기≫흠명기 2년 4월조의 남가야가 의탁할 곳이 없어서 갑자기 멸망했다는 내용이나 지방장관이 배치되었다는 것보다는 군의 주둔이 선행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금관가야가 멸망하기 직전인 531년에야 백제군이 남부의 안라가야지방에 진주하고804) 있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한편≪일본서기≫흠명기에는 백제가 신라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신라와 가야 사이에 배치한 일본으로부터의 용병인 일계 백제관료들805)의 본국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백제와 안라가야 등 가야 제국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계 백제관료로서 최초로 확인되는 인물도 역시 수적신압산인데 그가 일계 백제관료로서 최초로 확인되는 것이 529년이다.806) 따라서 백제가 일계 백제관료를 가야지역에 배치한 것도 반파의 독자적인 움직임과 6세기 전반 신라의 가야진출에 맞추어서 취한 조치가 아니었는가 짐작된다.
따라서 백제는 반파의 세력확대에 대항해서 기문·다사를 점령하는 한편 일계 백제관료와 군령·성주라는 지방장관을 배치하여 직접지배를 시도한 셈이 된다. 그러나 기문·다사의 점령이나 군령·성주 및 일계 백제관료의 배치가 반파의 기문점령에서 촉발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807)
그런데 일찍부터 가야 제국이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백제의 직접지배체제의 구축은 가야 제국의 협력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금관가야 등에 대한 통합에 불안을 느낀 이웃의 안라가야 등으로서는 신라세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백제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백제의 가야지역에 대한 직접지배체제의 구축과 안라가야에 대한 군의 진주가 가능했던 원인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런데 신라와의 직접 충돌만은 피해야 할 입장에 있던 백제로서는 신라의 세력확대를 저지하면서 가야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의 이런 태도는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세력확대에 불과한 것으로 백제의 세력하에 있던 가야나 신라에 통합된 금관가야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제외한 가야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라의 가야 통합에 못지 않는 위협인 것이다. 따라서 안라가야 등 가야 제국과 백제와의 사이에는 불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된 것이 안라가야로 군령·성주 등의 지방장관과 일계 백제관료의 본국송환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안라가야가 가야 제국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802) ≪日本書紀≫권 17, 繼體紀 7년 6월·11월.
803) 그가≪日本書紀≫권 17, 繼體期 6년조와 7년조에도 등장하는데, 23년 3월조에는 백제 下哆唎의 장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804) ≪日本書紀≫권 17, 繼體紀 25년조의 분주에는 백제군이 531년에 안라가야에 진출하는 모습이 보인다.
805) 일계 백제관료에 대해서는 金鉉球, 앞의 책 참조.
806) ≪日本書紀≫권 17, 繼體紀 23년 3월.
807) 그와 같은 사실은≪日本書紀≫권 19, 欽明紀 5년(544) 11월조에 보이는 것처럼 가야의 군령·성주 등의 철수요구에 대해서 백제가 그들의 배치는 신라·고구려세력을 막기 위해서 불가피함을 설득하여 가야 제국을 납득시키고 있었던 점으로도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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